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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말이 사라진 사회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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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조끼를 입은 ‘채 상병 특검 거부권 저지 청년긴급행동’ 소속 청년들이 지난 5월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대통령의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비판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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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봉 | 법조팀장



뉴스를 보면서 곧 다가올 야근의 운명을 직감할 때가 있다. 내가 일하는 법조팀은 법원과 헌법재판소, 검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대한변호사협회 등을 담당한다. 그리고 논란이 되는 대부분의 사건은 고소나 고발, 수사와 재판 혹은 소송으로 이어진다. 최근 늘어나는 탄핵 심판 역시 헌재의 몫이다.



철저한 수사와 엄정한 재판이 필요한 사건이 있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사건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재판에서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법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법이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은 갈등 해결을 위해 법 이외에도 쓸 수 있는 수단들이 있다는 의미다. 태초의 수단은 말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의 수단을 가장 고도화한 것이 정당정치와 국회다. 투표로 국민의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는 이를 뽑고, 이들이 대화하고 타협하고 때론 경합하면서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 태초의 수단이 사라지고 있다. 정당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법으로 해결하겠다고 고소·고발에 나서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됐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야당의 탄핵소추도 더는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대통령 거부권은 14차례, 더불어민주당 탄핵소추안 발의는 8차례 이뤄졌다.



모든 거부권과 탄핵소추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거부권과 탄핵소추는 헌법이 보장하는 제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용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거부권은 여야가 대화하고 타협하고 승복하는 과정을 손쉽게 포기하게 한다. 탄핵은 어떤 일에 누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생략하고 9명의 법률가(재판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효과를 낸다. 두가지 모두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포기하는 행위다. 생각이 다른 이들이 대화를 포기하면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양극단으로 갈릴 수밖에 없다. 극단의 사회에서는 음모론이 힘을 얻는다. 상대를 악마로 만들수록 우리 편이 정당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진영에서는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가 사실처럼 소비된다.



이런 현상은 김진표 전 국회의장이 최근 펴낸 회고록에 담긴 윤 대통령의 언행에서도 나타난다. 2022년 12월5일 독대 자리에서 김 전 의장이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사퇴가 필요하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지금 강한 의심이 가는 게 있어 아무래도 결정을 못 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 사고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김 전 의장이 “이야기를 멋대로 왜곡”했다고 주장하지만, 대화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대화가 사실이라면, 윤 대통령은 ‘좌파가 참사를 기획했다’는 극단적인 음모론에 매몰되어 있는 셈이다. 14차례에 걸친 거부권 행사 역시 자신에 대한 비판 세력을 ‘악마’로 보는 이런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 법무부는 최근 기자들에게 ‘알림’을 보내 “언론 기사에서 대통령의 ‘거부권’과 ‘재의요구권’이라는 용어가 혼재”되고 있다며 “‘거부권’이라는 용어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적법한 입법 절차인 ‘재의요구권’에 대하여 자칫 부정적인 어감을 더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어감이 아니다. 대화를 포기하고 거부권부터 행사하는 태도 자체다. 법무부의 알림은 윤 대통령의 태도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로 읽힌다.



윤 대통령의 태도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6월30일 오후 기준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를 요구하는 국회 청원이 70만명을 넘겼다. 지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부터 최근 총선까지, 국민들은 여러차례 윤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도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들에게도 최후의 수단밖에 남지 않는다. 그 이전에 부디 윤 대통령이 음모론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대화 자리로 나오길 빌어본다.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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