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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국책 연구기관의 아무말 대잔치,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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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잇따르는 헛발질

국가 싱크탱크의 추락

조선일보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과 지방 균형 발전 정책에 따라 국책 연구기관들도 일제히 하방했다. 2014년부터 사회 분야 국책 연구소들이 옮겨간 세종시 국책 연구 단지 일대. 이번에 '여아 조기 입학' '노인 은퇴 이민' 제안으로 논란이 된 조세재정연구원도 여기에 있다. /국책연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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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발달 정도가 여성보다 느리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을 1년 조기 입학시키면 향후 적령기 남녀가 서로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 국책 연구기관이 이런 저출산 대책을 발표했다. 여론과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예닐곱 살 딸들을 남학생 수준에 맞춰 학교에 일찍 보내라고?” “여자를 태어날 때부터 출산 도구로 보나?” “이런 시대착오적 제안의 학문적 근거는 뭔가?”

근거는 없었다. 여아 조기 입학과 남녀 교제, 출산율 제고의 상관관계에 대한 아무런 실증적 연구도 담기지 않은 그냥 주장일 뿐이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경제 부문 2위 국책 연구소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조세연)의 공식 정책 간행물 ‘재정포럼 5월호’에 실린 것으로, 장우현 선임연구위원이 작성했다.

여아 조기 입학, 은퇴 이민이라니

‘생산 가능 인구 비중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정책 방향에 대한 제언’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엔 ‘비(非)생산 인구’인 노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자는 막가파식 발상도 담겼다. “노령층이 물가 저렴하고 기후가 온화한 국가로 이주하여 은퇴 이민 차원으로 노후를 보낸다면 생산 가능 인구 비중을 양적으로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조세연 홈페이지에 “예산 받아 한다는 소리가 뭐?” “여성·노인 혐오 잘 봤다” “사과문과 해당 연구원 징계를 요구한다”는 시민 분노가 쏟아졌다. 조세연은 “해당 보고서는 연구원 개인 의견”이란 앞뒤 안 맞는 해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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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과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대한 대책으로 '여아 조기 입학'과 '노인 은퇴 이민'을 제안한 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보고서를 보고 분노한 시민들이 항의를 쏟아냈다. /조세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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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집현전’ ‘대한민국 대표 싱크탱크’로 불리던 국책 연구기관이 잊을 만하면 황당한 헛발질로 도마에 오른다. 규모와 명성에 걸맞지 않는 부실한 보고서, 정부 입맛에 맞춰 진실을 감추는 곡학아세, 여론은 안중에 없는 듯한 딴 세상 표현, 꼬리 자르기식 나 몰라라 대응이 이어진다.

저출산 대책 헛발질로 역사에 남을 보고서는 2017년 보건사회연구원에서도 나왔다. 당시 보사연이 주최한 포럼에서 소속 선임연구원이 “혼인율을 올리려면 초혼 연령을 낮춰야 한다”며 “대기업과 공공기관 채용 시 여성 지원자의 불필요한 스펙 쌓기(연수·학위·자격증)가 불리하게 작용하게 하고, 고학력 여성의 하향 결혼을 은밀한 음모 수준으로 벌여야 한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보직 사퇴하고 기관이 공개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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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보건사회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의 저출산 대책으로 '여성의 불필요한 고스펙 쌓기에 불이익을 주자'는 제언에 쏟아진 시민의 분노. /보사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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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때 집값이 폭등하자,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가리려 국책 연구소들이 총동원됐다. 2021년 9월 국토연구원은 “서울과 강남 3구에서 집값 상승의 기대심리가 커진 것은 실제 가격이나 거래량보다는 ‘최고가 거래가 경신’ 같은 언론 보도의 영향이 더 크다”는 보고서를 냈다. 앞서 국토연과 조세연, 주택산업연구원 등은 2021년 초 자체 연구에서 전년도에 이어 또 집값 상승 전망이 나오자 이를 일제히 비공개 처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한국노동연구원은 2018년 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이 줄고 물가가 오르자 “고용 둔화는 최저임금 인상 탓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2019년엔 그 상관관계를 부정할 수 없게 되자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9명 중 8명이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사람들이니, 최저임금 인상은 박 정부 책임”이란 궤변을 내놨다.

땅에 떨어진 국가 두뇌의 자존심

국책 연구기관들은 1970~80년대 개발시대에 국내 유일의 싱크탱크로 설립됐다.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국가 어젠다를 개발하고 끌어간다는 막강한 위상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뒤따라 민간과 대학, 시민단체, 정당, 지방자치단체 소속 연구기관들이 생겼다. 2000년대 대기업과 유명 대학 부설 연구소에 자본과 인재가 몰리면서 국책 연구소 원톱 체제에 균열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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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6년 개인 자격으로 한구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신청하고 허가받은 허가장. 그는 KIST는 물론 국방과학연구소(ADD),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여타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사재를 출연해 국가 씽크탱크 시대를 열었다. /김주한 전 과학기술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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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타는 노무현 정부 때 결정된 행정수도 건설과 공공기관 지방 이전으로 국책 연구기관이 일제히 흩어진 것이다. 2014년 나라키움 세종국책연구단지에 경제인문사회 연구소들이 이전하고 국가 과학기술 연구소들도 지방에 분산됐다. 정책 수요자들이 몰려 있고 각계 연구자들의 교류가 활발한 수도권에서 국책 연구소 연구원들은 멀리 떨어져 고립됐다.

가뜩이나 국책 연구소의 위상과 임금 등 처우도 민간에 밀리는 데다, 지방의 연구·주거·자녀 교육 여건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다 보니 유학파 박사급 인재들이 국책 연구기관 취업을 꺼리게 됐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민간·대학으로 가기 전 경력 쌓기용 정거장으로 거쳐 가는 경우도 많다. 국책 연구원들이 근무 중 대학 강의 등 ‘투잡’을 뛰다 국정감사에서 무더기 적발되기도 했다. 정부 부처조차 맹탕인 국책 연구소 보고서를 패싱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지난 문재인 정부는 국책 연구기관의 말살 시대로 꼽힌다. 기관장 인사부터 연구 용역 몰아주기, 보고서 내용 검열에 이르기까지 탈원전·소득 주도 성장 등 정권 코드가 지배, 연구의 독립성과 품질을 확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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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2017년 6월 부산 기장군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탈원전 정책을 밝히고 있다. 당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사망자가 많았다'고 하는 등 잘못된 팩트를 근거로 댔으며 국책 연구기관들도 이런 정권 기조에 맞춘 보고서를 내야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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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경제연구원은 원전의 효율성을 일부러 과소 추계했고, 원자력연구원은 개점휴업 상태로 고급 인력의 손발을 묶어놨다. KDI·한국은행 등 권위를 자랑하던 경제 국책 연구기관은 장밋빛 전망 내놓기에 급급, 유가·환율·성장률 등 경제지표 예측 정확도가 삼성·LG 등 민간 연구소들에 밀렸다.

2018년 외교·안보 국책 연구소에서 사직한 인사는 “문 정부의 ‘자주파’끼리 밀어주기 문화가 강해 한미 동맹 등을 소신 있게 연구할 분위기가 안 됐다”고 말했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8년부터 5년간 4500명대였던 국책 연구소 연구원의 3명 중 1명(36%)이 사직하는 엑소더스가 벌어졌다. 공석은 임시직으로 채웠지만 맨파워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이번에 ‘여아 조기 입학’ ‘노인 이민’으로 문제가 된 조세연은 문 전 대통령이 앉혀 놓은 현 김재진 원장과 연구원 간 갈등으로 5년간 144명이 그만둬 이탈률이 최고였던 조직이다. 황당한 헛발질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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