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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나를 알아봐주는 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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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스푸모니(Spumoni)

지인 중에 바텐더 자격증을 따신 분들이 있다. 일단 A. 한때 열렬한 단골이 있는 바를 운영했던(바의 이름도 무척이나 근사하다) 그의 요즘 취미는 바 호핑(bar hopping)이라고 했다. 바가 모여 있는 을지로 같은 데가 바 호핑하기 좋다며 하루에 세 군데가 딱이라고 하셨다. 원칙이랄 것까지야 없지만 한 바에서 한 잔을 마시고, 30분을 머물며, 둘도 좋지만 혼자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하고 싶어졌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다’라는 호프(hop)로부터 유래한 ‘바 호핑’이라는 단어가 경쾌한 A의 입에서 나오니 무슨 재즈댄스의 한 동작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칵테일바에 혼자 간 게 무척 오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났고.

B와는 얼마 전 함께 칵테일바에 갔다. 이럴 때 나는 매우 겸손해진다. 나도 칵테일에 대한 나름의 견해와 주장이라는 게 있지만 잠시 접고 싶어진달까. 그러고는… 권위자께서 추천하거나 주문해주시는 걸 마신다. 평소의 내가 같이 간 사람들에게 골라주는 역할이었다는 건 잊는다. 칵테일바에 가면 이런 걸 마셔야지라며 계획했던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권위자가 구성한 그날의 라인업이 더 궁금하기에. 나는 술에 관해서라면 꽤나 지적인 사람인 것이다.

호스넥, 스푸모니, 민트줄렙. B의 라인업은 이렇게 세 잔이었다. 세 명이 한입씩 맛보고 원하는 걸 고르자는 게 그분의 제안이었다. 나는 호스넥을 골랐다. 가장 입맛에 맞는 것은 스푸모니였지만 말이다. 일차에서 다른 술을 마시고 와서 스푸모니는 좀 약했고, 민트줄렙은 익숙하기에 이름만 알고 마셔본 적은 없던 호스넥을 골랐던 것이다. 브랜디나 버번에 진저에일을 타서 만드는 이 칵테일은 간단한 동시에 호사로운 느낌이 있다. 레몬 하나의 껍질을(그것도 통째로!) 구불구불하게 칼로 오려내어 콜린스 잔 밖까지 늘어뜨리며 ‘말의 목(Horses neck)’처럼 연출하는 칵테일이라서다. 그렇기에 내가 먹자고 레몬 껍질을 정성스럽게 오리며 호스넥(Horse’s neck)을 연출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호스넥은 레몬 껍질을 길고도 얇게, 우아한 선으로 오려내는 데 승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발레리나의 목덜미처럼 섬려한 선으로 말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집에서 하기 버겁다. ‘나 같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나의 실력과 성격에 대한 비애(?)가 깃들어 있다. 음식은 좀 하는 편인 나는 칵테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음식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어딘가 뚝뚝 끊긴다. 플로우의 부자연스러움은 맛에도 표현되어 먹을 만하지만 좋지는 않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세상에는 좋아질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잘하지 못하는 걸 붙들고 있을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질이 부족한 사람인지 모르고 사두었던 이런저런 리큐르들이 소진되지 않고 있다. 야심차게 장만한 셰이커도 그대로 있다. 흔드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아무래도 하지 않게 된다.

조선일보

캄파리와 자몽 주스를 섞고 진저에일을 거품이 나게 부어 만드는 칵테일 '스푸모니'. /페이스북


스푸모니가 마음에 남았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흔들어 만드는 칵테일이라거나 계란 흰자가 들어간다거나 했더라면(전문용어로는 ‘번잡스러움’)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어서 만드는 칵테일은 다르다. 기교가 필요 없다고 해도 되겠다. 술 관련 만화나 전문서를 보면 얼음 모서리의 예리함이 없어질 때까지만 저으라거나 4번인가 5번만 저으라고 하는데, 나는 그냥 적당히 한다.

하지만 아무리 쉽다고 해도 끌리는 맛이 아니었다면 나와 관계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스푸모니는 내가 좋아하는 네그로니와 솔티독을 절묘하게 혼합한 맛이었다. 그럴 수밖에. 네그로니의 육체인 캄파리와 솔티독의 정신인 자몽 주스를 더한 게 스푸모니 아닌가. 씁쓸하고 진지한 네그로니보다 산뜻하고, 명랑하며 예민한 솔티독보다 내밀하다고 해야 하나.

언제부턴가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음식이나 술의 성격을 알아가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건 내게 상당히 도움이 된다. 내가 끌리는 사람이나 술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며 그렇기에 나의 열정을 쓸데없이 소진할 일이 없다. 모든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게 목표가 아니듯이 모든 술과 잘 어울리고 싶지 않다.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처럼 나를 알아봐 주는 술과 있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술꽂이 구석에 처박혀 있던 캄파리를 꺼내 먼지를 털었다. 만드는 법은 정말 간단하다. 굵은 실린더처럼 생긴 콜린스 잔에 얼음을 넣고 캄파리 30mL, 자몽 주스 45mL를 붓는다. 자몽 조각을 더해도 좋고 더하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손을 심장 가까이 들어 올려 진저에일을 붓는다. 콸콸콸. 이탈리아어로 거품이라는 뜻의 스푸모니(Spumoni)에 걸맞게 거품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낙하 에너지를 크게 만들어야 거품이 잘 이는 법이니까.

아름답다. 역시 칵테일은 눈으로 마시는 술이다. 누군가에는 눈으로도 마시는 술이겠지만 내게는 눈으로 마시는 술이 칵테일이다. 맛이나 향기보다도 색채다. 취하자고 마시는 술이 아니라 즐겁자고 마시는 술이 칵테일인데 눈이 즐겁지 않으면 즐거울 수가 없다, 는 게 나의 생각이다. 캄파리를 좋아하지만 캄파리 소다와 가리발디(오렌지주스를 탄 캄파리)를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은 색 때문이었다. 캄파리는 너무 붉고, 오렌지주스를 탄 캄파리는 탁했다. 내 눈에는 그랬다.

내가 만든 가정용 스푸모니는 며칠 전 바에서 마셨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몽 조각을 더했기에 더 나아진 면도 있다. 스푸모니는 아름답고도 맛있다. 우아한 이름만큼 맛도 우아하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고, 산뜻하지만 무게가 없진 않다. 공작 깃털 세 개의 무게랄지. 가장 좋은 건 쓴맛의 레이어다. 캄파리의 어른스러운 쓴맛에 자몽의 쓴맛이 더해져 쓴맛의 권역이 풍부해졌다. 이 얼마나 적절한 맛인가. 네그로니보다 부드럽고 캄파리 소다보다 우아하며 가리발디보다 섬세하고 아페롤 스프리츠보다 어른스럽다.

아, 이런 건 치아를 드러내지 않고 웃는 어른의 웃음이다. 더 미묘할 수 있지만 구태여 그렇게 복잡한 사람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가벼운 웃음. 스푸모니에서는 그런 자몽 색 웃음의 맛이 났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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