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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의 마음극장은?
어떤 영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가 왜 저기 들어 있나 싶은,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드러낸 것 같은, 친구에게 꼭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그런 장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동그란’이 격주로 마음 속에서 재편집되는 대사, 기억의 영사기에서 반복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버스 멀미 때문에 수학여행 신청을 안 했는데, 학교에 아무 연락 없이 3일간 무단결석했다는 이유로 정학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세요. 수학여행을 안 가니 그냥 집에 있었던 건데 그게 무슨 잘못인지 그 당시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당시 학생들을 인솔하고 돌아온 2학년 선생님들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던 게 분명해 보였어요.
고등학생 때는 교장실 투서사건의 주인공으로 전교생의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어요. 두발 및 복장 단속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써서 교장실 가는 복도에 설치된 건의함에 넣은 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때 갓 발령받은 초임교사였던 우리 담임 선생님이 며칠 동안 울고 다닌 걸 생각하면 무척 죄송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엄마는 역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죠. 그만큼 무서운 일이었어요. 내 문제로 엄마에게 곤란을 겪게 하는 건 내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어요. 영화 ‘아마겟돈 타임’(제임스 그레이 감독·2022)의 주인공 폴(뱅크스 레페타)이 겪는 상황을 보면서 고스란히 당시 감정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어요. 어린 시절의 두려움이란, 사실 이유가 분명한 것이니까요.
뉴욕 퀸즈의 공립학교 6학년에 다니는 폴은 그림을 좋아하고, ‘우주비행사'가 꿈인 흑인 친구 조니(제일린 웹)를 좋아해요. 폴은 자기가 원하고 느끼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지만 어른들 눈에는 과할 때가 있어요. 어머니(앤 해서웨이)가 가족을 위해 정성껏 차린 음식을 먹다 말고 중국 음식을 시키는가 하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주는 과제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든지 하는 거요. 친구를 향해 편견 없이 열린 마음은 아이답지만 위험에 대한 감지력이 없고 미숙하여 곤란한 상황에 휘말리기도 쉬워요.
엄마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남편 아비(제러미 스트롱)에게 일렀어요. 아빠의 분노는 가장 두려운 것이었지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고 있는 폴의 상기된 얼굴을 보는데, 오래전 겪었던 감각이 살아났어요. 어빙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있는 힘껏 폴을 내리칠 때 말이죠. 폴은 애원했어요. 제발 때리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그런 말이 나올 정도면 최악은 아니에요. 악. 소리조차 안 나온다니까요.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충격이었냐면 아무리 울어도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가슴을 부여안고 내가 나를 천천히 달래야 했어요. 그는 자기가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르고 그런 거라고, 내가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안다면 그렇게 할 리가 없다고요. 그렇게 나에게 벌어진 폭력의 상황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시간이 있었어요. 내가 가장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나를 향한 분노의 불꽃을 느낄 때의 그 공포감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가장 황당한 것은 도무지 그렇게까지 맞을 만한 잘못인지 무엇인지 모른 채로 그런 일을 겪는다는 것이에요. 어머니가 정성껏 차린 음식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어른들이 말했지만, 당장 내 앞에 놓인 음식이 맛이 없고 다른 게 먹고 싶은데 그게 왜 잘못된 건지, 친구랑 화장실에서 연기를 피우며 같이 웃은 것뿐인데 그게 엄마가 불려오고 아빠가 화장실 문을 부수고 가죽 혁대를 휘두를 만큼 큰일인지 이해할 길 없는 폴의 입장이 참 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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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부모의 입장도 보여요. 배관공의 아들로 그 역시 집수리 기술자로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에게 가장이라는 무게는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어요. 처가 쪽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만큼 아들도 그런 사정을 알고 성실히 공부해 어엿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라는 생각은 그에게만 있는 것이지, 아이가 그런 생각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란 말이죠. 부모의 생각을 이뤄주기 위해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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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폴은 조니를 꼬드겨 진짜 사고를 쳐요. 함께 플로리다로 도망갈 돈을 마련하려고 학교 컴퓨터를 훔치죠. 폴은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여 과격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겠다고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현장에서 경찰서에 붙들려 갈 정도로 큰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됐죠. 하지만 아빠는 마침 경찰서의 담당 조사관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 폴을 쉽게 빼낼 수 있었어요. 대신 폴과 범행을 함께 한 조니가 모든 걸 뒤집어쓰게 됐죠.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조용히 차를 세우고 말했어요. 엄마에게도 말하지 말고 이 행운을 그냥 받아들이자고.
“잘 들어. 네 친구가 책임을 지는 건 불공평한 일이야 그래 불공평해. 너도 많이 속상하겠지. 하지만 인생은 불공평한 거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지. 나도 싫어. 하지만 우린 살아가야 해.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주어진 삶을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뒤돌아보지 말고.”
이민 3세대로 너무도 아픈 가족사와 험난한 이민사를 가지고 있는 가계도의 끝에서 아버지는 부모 세대가 일군 기반에 의한 조그마한 기득권을 맛봅니다. 그 행운에 감사하는 심정에 공감 못 한다고 말할 수가 없네요. 러시아계 유대인임이 드러나는 성을 평범한 것으로 바꾸고, 아들들을 백인들만의 사립학교에 보내 엘리트 의식을 심어주고, 그렇게 사회의 주류를 향해 나아가는 이 핏줄의 행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폴과 조니가 경찰서의 조사관 앞에서 대질 심문을 받을 때, 폴은 자신이 조니의 친구이며, 모든 게 자신이 계획한 범행임을 시인합니다. 하지만 조니가 나서죠. 모두 자기가 한 일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지요. 자기가 뒤집어쓰는 것이 간단한 해법이라는 걸 알 만큼의 경험치가 조니에게는 있었죠. 그러면 적어도 친구인 폴은 무사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설 만큼 조니는 합리적인 체념에 길들어 있었던 거예요. 친구임을 부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꺼이 희생을 감당하는 조니의 얼굴 역시 언젠가 내가 본 모습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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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너는 겪지 않아도 돼. 잊어버려도 돼.”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래전에 억지로 묻어놓은 그 목소리가 다시 살아났어요. 함께 작당한 어떤 일이 들통났을 때 ‘너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슬쩍 빼줬던 친구들, 정학을 당할 뻔한 일이 더이상 번지지 않도록 뒤에서 손써준 선생님들. 조니를 보며 알게 되었죠. 당해본 자들이 체득하는 피해 최소화의 지혜와 윤리 감각. 불공평함에 분노한 채로는, 그 희생에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채로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 주먹을 휘두르게 될지 모르는 채로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조용히 이 가계도의 끝에서, 내가 끝이라는 감각으로 걸어왔다는 것을, 그래서 나의 아마겟돈 타임 역시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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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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