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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국제 왕따' 푸틴, 베트남에서 '형님·삼촌' 사랑받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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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20일 베트남 하노이 주석궁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공식 환영행사에서 베트남과 러시아 국기를 들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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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 북한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일 곧바로 베트남을 찾았습니다.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초청으로 이뤄진 국빈방문입니다. 19일 밤 늦게 도착해 19~20일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베트남 도착이 늦어져 20일, 만 하루가 채 되지 않는 '당일치기' 국빈방문이 됐습니다.

베트남 곳곳에선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가득한 환영이 느껴졌습니다. 19일 오전부터 하노이 시내에선 푸틴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한 국빈방문 리허설로 분주했습니다. 주요 도로를 통제하고 곳곳에 베트남과 러시아의 국기가 함께 내걸었죠. 리허설을 지켜보던 하노이 시민 응우옌 비엣 꽝(49)씨는 기자에게 "베트남에게 있어 러시아는 큰형과 같은 나라다. 푸틴 대통령은 아이돌 같은 정치인"이라 말했습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행인들도 "러시아는 진정한 형제·동지의 나라"라며 입을 모았습니다. 일부는 "중국과는 다르다"고 말을 보태기도 했죠.

지난해 9월과 12월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각각 베트남을 찾았습니다. 주요 2개국(G2)의 정상이 베트남을 찾았으니 베트남도 들떴지만 체감할 수 있는 환영 열기는 달랐습니다. 20대부터 50대,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베트남 '친구'들이 있는 페이스북에 들어가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20일 새벽에 도착한 푸틴 대통령의 사진을 자신의 피드나 스토리(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기능)에 올려놨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친구'들은 구소련에서 유학하거나 일했던 것을 알고 있어서 이해가 됐지만 20대 젊은 친구들도 '푸틴 삼촌'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 등을 맞대고 싸워준 동지…전 세계가 등 돌려도 뗄 수 없는 관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에서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지만 베트남은 정부와 국민 모두 러시아와의 관계를 각별히 여기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지난 15~16일 스위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회의에 초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았죠. 중국이나 캄보디아와 달리 그 이유도 공개하지 않았지만 외교가에선 "예상했던 일"이란 반응입니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요. 당장 미국·유럽이나 중국보다도 경제 왜 그렇게 중요한걸까요?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은 근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소련·러시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비슷한 중국과도 마찬가지 아니겠냐고요? 중국에 대한 인식·감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자는 하노이 국가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베트남 근현대사를 전공했습니다. 담배와 차만 있다면 하루 온종일 이런저런 문제로 갑론을박하는 학과 교수님들도 입을 모아 동의하는 몇 안되는 주제가 바로 소련입니다. 1960년대 말부터 중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대규모로 삭감했지만 소련은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이어왔다는 점, 그래서 "소련(러시아)이 없었더라면 베트남의 통일도, 이후 통일 베트남의 재건과 건설도 힘들었을 것"이란 겁니다.

베트남의 국부·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호치민 주석은 1955년 소련을 방문해 각종 차관과 원조를 받아옵니다. 농업은 물론 산업 발전을 위한 각종 기계와 장비 구입을 위한 지원이 골자였죠. 이후 국영농장 건설은 물론 각종 산업 프로젝트부터 학교와 병원 건설·개조 등에 대한 전방위 지원이 뒤이어졌습니다. 이런 소련의 지원은 베트남전쟁 당시 군사적 지원과 전후 경제 재건시기까지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1955년~1975년까지 베트남에 대한 사회주의 국가 전체의 경제 원조에선 중국이 52%, 소련이 29%를 차지했습니다. 숫자로만 놓고 보면 중국의 지원이 더 크지만 1960년대 말 중국의 원조가 줄어들 당시 소련이 되려 원조를 늘렸단 점, 그리고 1970년대 말 80년대 초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중월전쟁 당시 소련이 계속해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했다는 점에서 소련은 베트남에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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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소련에서 유학 중이던 베트남 유학생들의 모습/베트남러시아유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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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계 곳곳, 국민들이 기억에 새겨진 '향수'
이 같은 경제·기술·군사적 지원 외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소련과 베트남의 인적교류입니다. 소련은 베트남에 폴리텍·농업 대학교 설립 등 학교와 병원의 건설·재건과 인적 자원 훈련을 도왔습니다. 베트남 유학생도 대거 받아 들여 70년대 초반에는 소련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베트남인들이 7000명이 넘었죠. 이 가운데 4500명이 소련의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소련 유학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도 이어졌고 해체 이후에도 베트남에선 수재들이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당연시 됐습니다.

이 시기 소련에서 유학한 인재들은 훗날 베트남 공산당과 국가를 이끄는 고위 지도자로, 각종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났습니다. 서열 1위인 쫑 현 서기장은 물론 농 득 마인 전서기장, 판 반 카이 전 총리 등 고위·원로 정치인들은 모두 소련에서 교육을 거쳤습니다. 베트남 최대 민간기업인 빈그룹의 팜 녓 브엉 회장 역시 소련 국비 장학생 출신이죠.

기자가 근현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하노이 국가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교의 원로 교수님들도 대부분 소련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총장까지 지냈던 지도교수를 비롯해 나이가 지긋한 정·재계 원로들은 기자가 "저도 여기서 대학원을 다닙니다"고 이야기하면 눈을 반짝이며 소련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공부했는지 옛날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 빛나는 눈으로 한참을 얘기하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향수와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던지요.

베트남 통일 이후, 1976년부터 개혁개방인 도이머이 정책을 실시한 1986년 이전까지의 배급시기는 오늘날 베트남인들에게도 기억의 한 켠에 선명히 남아 있는 '보릿고개'입니다. 이 시기 소련으로 유학이나 일하러 나간 자식이 베트남 집으로 보내온 소련제 난로와 다리미나 한 두 푼씩 모아 보내온 돈으로 산 선풍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자랑스러웠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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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호아빈 수력 발전소에 투입된 소련 전문가와 베트남 전문가들의 모습/호아빈성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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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임 후 구소련 채무 탕감…더 각별한 푸틴
그렇다면 푸틴 대통령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일까요? 물론 베트남 젊은 세대들도 한국처럼 상의를 벗고 얼음 물로 뛰어드는 푸틴의 '화끈한' 모습에 열광하는 면도 큰 것 같지만, 푸틴은 러시아와 베트남의 우호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2000년 첫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를 시작한 푸틴은 같은해 베트남이 과거 구소련에 진 채무의 85%(약 95억 달러)를 탕감합니다. 나머지에 대해선 현물(수출품)로 23년 동안 상환하기로 합의하죠. 이 채무 대부분은 '항미전쟁',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월남전)때 진 채무입니다. 베트남에겐 민족 해방과 통일이란 과업을 치른 전쟁에서 이뤄진 (고마운) 소련의 지원이었는데 이 채무를 탕감해 준 것이죠.

베트남 북부에는 동남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소인 선라수력발전소가 있습니다. 베트남에선 푸틴 취임 이후 구소련에 대한 채무가 탕감되며 한숨 돌리게 된 덕에 몇 년 후에 선라수력발전소에 착공할 수 있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선라 수력발전소는 베트남의 전력난 해결과 현대화·산업화에 아주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겨지죠.

선라수력발전소와 함께 중요한 수력발전 거점인 호아빈수력발전소는 아예 구소련에서 설계·감독 등의 지원을 해줬습니다. 워낙 힘든 건설과정이었던 탓에 베트남 기술자·노동자들은 물론 소련 전문가들도 10명 넘게 사망했죠. 이들 수력발전소에 가면 관계자들은 꼭 소련과 러시아의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날 베트남이 밤에도 밝게 불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베트남과 소련 영웅들의 피로 밝히는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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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으로부터 호치민 훈장을 수여받고 있는 푸틴 대통령/베트남 정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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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탕감 조치 덕분인지 베트남은 취임한지 1년밖에 안 된 푸틴 대통령에게 2001년 '호치민 훈장'을 수여합니다. 원래는 최고 훈장인 금성훈장을 수여하려 했는데 푸틴 대통령이 "어릴 적부터 호치민 주석을 존경해왔다며 호치민 훈장을 받겠다, 금성훈장은 나중에 (양국 관계에) 더 많은 기여를 하고 받을 만하다 싶을 때 겸허히 받겠다"고 고사해서 호치민 훈장을 수여하게 됐다는 것이 몇몇 원로들의 이야기입니다.

푸틴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소식이 전해지며 다양한 분석이 나왔습니다. 특정한 국가의 편을 들지 않는 베트남의 대나무 외교, 실용주의 외교정책·독자 노선과 전략적 자율성의 추구라는 분석도 있고 무기나 에너지 분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이란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이번 방문이 베트남에겐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양국 교역액은 약 36억 달러(약 5조원)으로 2021년의 절반에 불과한데다, 중국(1710억 달러)·미국(1110억달러)·유럽연합 EU(720억 달러)과의 교역액에 비하면 한참 작은 규모니까요.

이에 대해 싱가포르 ISEAS 유소프이삭연구소의 호앙 티 하 선임 연구원은 푸틴의 이번 하노이 방문이 "실용주의가 유일하거나 주요한 지도 원칙이 아니란 점을 강조한 것"이라 분석했습니다. 정서적 애착과 같은 요인도 베트남 엘리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항상 합리적인 비용과 편익 계산에 근거한 것만은 아니란 것이죠. 냉철하게, 합리적으로 실리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 같은 국제정치에서 때론 '기억의 외교'가 우리 생각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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