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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창작, 나와 맞나”…김풍이 아직도 방황하는 이유[Break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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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은 ‘자취 요리 연구가’이자 유튜버, 방송인이다. 한때는 카페를 운영했고, 캐릭터를 활용한 IP 사업도 했다. 연극배우, 광고 모델도 했다. 하지만 그는 ‘웹툰 작가’라고 불렸을 때 가장 행복하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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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작가, 영화 기자, 콘텐츠 기업 창업가, 카페 사장, 방송인, 두 돌 지난 아이의 아빠.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일을 마흔 중반에 다 거친 이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웹툰 ‘찌질의 역사’로, 누군가는 ‘냉장고를 부탁해’로 그를 접했을 것입니다. 수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파워 트위터리안이라는 재밌는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정체성을 하나의 수식어로 정의하긴 힘듭니다. 김풍(46)이라는 이름만이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웹툰 작가가 방송 연예 대상을 수상하는 시대지만, 그가 한창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작가가 한눈을 파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했던 김풍은 요리, 사업, 방송,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 기웃댑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한 가지에 진득하니 몰입하지 못할까’라는 자책의 감정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마흔여섯의 김풍은 좀 더 편안해졌습니다. 다양한 것에 호기심이 생기고, 그걸 시도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걸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집중력보단 순발력으로 승부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는 그의 내면을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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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부터 김풍이 진행하고 있는 유튜브 콘텐츠 ‘라면꼰대’. 게스트를 초대해 김풍이 자신만의 레시피로 라면을 끓여 준다. ‘침착맨’으로도 유명한 웹툰작가 이말년(오른쪽)과도 자주 합방을 한다.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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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은 그야말로 김풍의 전성기였습니다. 하는 것마다 잘 됐습니다. 데뷔작 ‘폐인가족’부터 주목받았고, 이후 선보인 ‘폐인의 세계’도 히트를 쳤습니다. ‘폐인’이라는 단어가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하게 된 데는 그의 역할이 컸죠. ‘폐인가족’이 잘나가면서 싸이월드의 미니미와 스킨을 판매하는 캐릭터 회사 ‘프로젝트109’를 차렸습니다. 웹툰을 자유롭게 올리기 위해 만든 웹사이트 ‘고구마언덕’은 한때 DC인사이드보다 화력이 강한 온라인 커뮤니티계 신흥강자였습니다.

―만화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때 반에서 학급신문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네컷만화를 그린 게 시작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제가 그린 만화를 보며 재미있어하는 것에서 저도 쾌감을 느꼈죠. 중, 고등학교 때였는데, 제가 그린 만화를 아이들이 돌려 보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들의 버릇을 과장하고 확대해서 캐릭터화한 이야기였어요. 점심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이 제 자리에 모여서 감상평을 나눴죠. 제 생각을 표현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반응해주는 게 즐거웠어요.

―첫 웹툰이 ‘폐인가족’이었는데 ‘폐인’이란 소재에 꽂힌 이유가 뭔가요?

지금이야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밈을 큰 미디어도 쓰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온라인 커뮤니티 용어는 그들밖에 몰랐어요. 당시 ‘다모’라는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다모만 보는 사람들을 칭하는 ‘다모폐인’이란 용어가 커뮤니티에서 쓰이기 시작했어요. 저도 한창 커뮤니티를 하던 시절이라, 폐인이 하나의 캐릭터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온라인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만화에 담으니 커뮤니티를 안 하는 사람들은 ‘이게 왜 웃겨?’라고 반응했어요. 그게 그 만화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Z세대들이 뭔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해서’에요.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에서 놀고 싶은 심리가 ‘폐인가족’의 인기에도 작용한 것 같아요.

―‘폐인의 세계’는 웹툰의 시초라고 불립니다. 당시엔 웹툰이란 단어도 없었다고요.

‘마린블루스’나 ‘스노우캣’처럼 작가들이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해 종이 만화를 그대로 올리는 경우는 있었어요. 하지만 제 만화는 커뮤니티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었으니, 커뮤니티에 올리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생긴 지 2년 정도 된 DC인사이드에 폐인가족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게시판 성격과 맞지 않는다며 만화가 자꾸 삭제되는 거예요. 댓글이 3000개씩 달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는데 삭제되는 게 아까워서 김유식 대표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냈어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메일을 본 김 대표가 ‘카툰 연재 갤러리’(카연갤)라는 게시판을 새로 열어줬고, 놀이터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 놀이터에서 저도 재미있게 놀았고 다른 작가들도 놀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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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동아일보와 인터뷰 했을 당시의 김풍.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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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즐겁기만 한 시간이 계속됐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진 않습니다. 김풍은 자신의 30대를 ‘이상하게 뒤틀린 모습’이라고 묘사합니다. 타인을 시기하고, 그런 나 자신도 싫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웹툰 작가 외길만 걸으며 성과를 내는 동료들에 비해 이것저것 기웃대는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웹툰 작가들과의 만남을 기피했고, 혼자만의 세계로 파고들었습니다. 영감은 고독에서 왔습니다. ‘찌질’ 그 자체였던 자기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한 작품 ‘찌질의 역사’는 기나긴 외로움의 끝에서 나왔습니다.

―백수로 지낸 기간이 길었던 30대 초반이 ‘뭘 해도 안 되는 시기였다’고요.

나름 바쁘게 달려왔기에 서른 살에 1년만 안식년을 가져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1년이 2년, 3년이 됐어요. 매너리즘에 빠져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트위터만 했어요. 폐인가족 시즌2를 시작했다가 반응이 별로라 접기도 했고요. 그땐 창작하는 사람들은 안 만났어요.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대충 폐인 캐릭터를 그려서 올리면 사람들이 좋아해 줬는데, 만화를 다시 시작했을 땐 상당히 수준 높은 웹툰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따라잡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죠. 노력은 안 하면서 열망만 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 살았어요. 동료 작가들은 한 우물만 파면서 성장하는데 전 뭘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이 된 거죠. 잘나가는 작가들을 보며 질투도 많이 했어요. 그런 나 자신도 싫었어요. 특별히 노력도 안 하면서 잘 나가는 사람을 질투만 하니까요. 당시의 저는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어요.

―일종의 자기혐오였네요.

그 당시 힘들고 괴로웠던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일기를 썼어요. 그걸 나중에 다시 꺼내 읽어보니 자기 객관화가 되더라고요. 제삼자의 시각에서 보니 이건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 같았어요. 그게 ‘찌질의 역사’의 시작이었어요. 그 웹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저를 다 쪼개서 넣었어요. 전부 저의 페르소나인 거죠. 주인공 민기는 제 중고등학교 시절, 준석이는 이성적으로 판단 하려고 하는 애늙은이지만 좀 솔직하진 못한, 성격적으로 지금의 저와 비슷한 인물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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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독자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만화’라는 극찬(?) 속에 수많은 명장면을 낳은 웹툰 ‘찌질의 역사’. 김풍이 스토리를 맡고, 심윤수가 작화를 했다. 와이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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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의 역사’는 드라마화가 결정됐지만, 방영에 난항을 겪고 있어요.

전 예전에 했던 작품들은 오글거려서 못 봐요. ‘싸드 아일랜드’는 네이버에 아직 올라와 있는데 창피해서 내리고 싶지만 그냥 뒀어요. 제가 나태해질 때,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반면교사를 삼으려고요. 하지만 ‘찌질의 역사’는 제 만화인데도 볼 때마다 설레어요. ‘사람들이 좋아해 주지 않아도 나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작업했거든요. 속에서 갖고 있었던 이야기를 배설하듯 각본을 썼어요. 그러다 보니 다 쓰고 나서도 후련하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애정이 각별한 작품인 만큼 아쉬움이 드라마화가 난항을 겪는 게 아쉽긴 하죠. 각본 쓰는 데에만 2년이 걸렸으니까요. 언젠가 빛을 보길 바라지만 어떻게 될 진 모르죠.

―찌질의 역사는 이른바 슈퍼 IP가 됐어요. 또 이런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나요.

‘찌질의 역사’를 마무리 지을 때 ‘작가는 나와 맞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건 뭐건 일단 계속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그게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찌질의 역사’는 그와 반대로 제가 꽂혀서 나온 작품이거든요. ‘무슨 아티스트도 아니고 왜 예술가처럼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지금도 신작 준비를 하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는 것 같은데 뭐지?’하면서 계속 맴돌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죠. 내가 재밌어야 하고, 봐도 봐도 설렜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못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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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로 활동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김풍은 여전히 ‘나를 흥분하게 하는’ 소재를 찾는다. 본인에게 재미가 없어도 어떻게든 창작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게 ‘프로’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내가 꽂혀서 파고들 수 있는 이야기’로 작업을 하고 싶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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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이 많습니다. 다수의 작품이 인기를 끌었고 마니아층도 두텁지만 ‘웹툰 작가가 내 길이 맞나’를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소소한 성공을 거뒀던 다른 길들에서 확신을 본 것은 아닙니다. 활발하게 방송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건 창작’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공 가도를 달릴 때도,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그는 늘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합니다. 끝없는 자아 성찰, 그게 김풍을 진정한 창작자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웹툰 작가부터 영화 잡지 ‘엔키노’ 기자, 캐릭터 회사 창업가, 연극배우, 요리연구가, 카페 사장님, 드라마 대본 작가까지…. 새로운 일을 쉽게 시작하시는 편인 건가요?

20대의 저는 피가 들끓었고, 늘 새로운 걸 하고 싶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아요. 대학 시절엔 부양에 대한 책임이 없잖아요. 그게 가장 큰 전제조건인 것 같아요. 실패해도 데미지가 별로 없죠. 그 경험치가 마음속 씨앗이 돼요.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겁이 덜 나게 하는 씨앗이죠. 10 정도의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그 다음엔 12, 13 규모의 일에 도전하는 게 힘들지 않아져요.

새로운 시작이 힘든 사람들을 위해 해 주실 조언이 있다면요.

중요한 건 순발력이에요. 나이가 들면 무조건 순발력은 떨어져요. 저도 이젠 새로운 걸 잘하지 못해요. 나도 모르게 ‘이건 이래서 안 돼, 저건 저래서 안돼’라며 재고 있거든요. 하지만 젊었을 땐 좀 잃어도 돼요. 큰돈 안 드는 선에서 재밌어 보이는 걸 순발력 있게 해 보는 거죠. ‘다이어트 해야지’라고 마음먹었으면 그날 바로 뛰는 거예요. 제가 100kg이 나갔을 때 ‘다이어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새벽 3시였거든요. ‘새벽 3시에 뛰지 말라는 법 있어?’라는 생각으로 미친 사람처럼 나가서 뛰었어요. 그게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온 것 같아요. 새로운 것에 시도하는 게 기질적으로 안 맞는 사람들이라도, 이 악물고 한 번 해보세요. 그럼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이 붙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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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면서 ‘자취요리연구가’로 유명세를 얻은 김풍. JTBC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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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 김풍’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신작 계획이 궁금합니다.

저같이 물고기처럼 사방에 시선이 쏠리는 사람들은 작가하기 힘든 체질이에요. 그래서 저는 엉덩이 무겁고, 옆에서 무슨 얘길 해도 자기 일에만 몰입하는 사람이 너무 부러워요. 창작은 마치 예쁜 아동복 같아요. 몸에 안 맞는데 너무 입고 싶다고 손가락이라도 억지로 끼워 넣고 있는 느낌이죠. 그런데도 여전히 창작은 너무나 하고 싶어요. 목표는 올해 안으로 ‘이야기할 게 생겼다’고 말하는 거예요. 내년 초엔 선보이고 싶어요. 커다랗고 굵직한 이야기보단 인간의 내면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찌질의 역사도 내면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그 연장선이에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제각각의 괴물 같은 모습들이 있거든요. 그걸 본인이 인정하긴 힘들죠. 각자가 외면하려는 괴물 같은 모습을 다뤄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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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중반을 넘어선 김풍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실행력이 좋다는 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이면엔 산만함이 있어요. 전 성인 ADHD가 있어요. 집중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제 성격의 양면성이죠. 모두에겐 성격의 장단점이 있어요.”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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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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