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9 (토)

645년 6월 20일 당군 막아낸 안시성 전투, 성주는 ‘양만춘’이 아니다 [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아일보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 대군과 벌인 안시성 전투를 그린 그림. 동아일보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645년 3월 9일, 당 태종이 고구려에 선전포고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네 번 공격했으나 그 땅을 얻지 못했다. 이제 그 전사자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왕의 치욕을 갚아주고자 한다.”

고구려왕의 치욕이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정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나라 군대는 4월 1일 요하를 건넜다. 곧이어 현도성, 개모성을 함락시켰다. 당군은 요동성을 공격한 지 보름도 안 돼 함락시켰다. 수나라 백만대군을 막아냈던 요동성이었지만 당 태종의 거센 공격을 이겨낼 수 없었다. 개전 두 달 만인 6월 1일에는 백암성도 성주의 투항으로 당에 넘어갔다.

이제 고구려 서쪽에 강력한 성은 안시성밖에 남지 않았다. 당 태종은 안전을 기해 안시성을 건너뛰고 그 남쪽의 건안성을 공략하여 안시성을 포위하는 방안도 생각했다. 하지만 안시성에서 당군의 보급선을 끊으면 곤란해진다는 건의에 따라 안시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안시성 공격을 망설인 것은 안시성주의 명성 때문이었다. 당 태종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안시성은 험한 데다가 군사도 용맹하고 성주도 재주와 용기가 있다. 연개소문이 군주를 해쳤을 때 안시성주가 복종하지 않았기에 연개소문이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주어버렸다고 한다.”

6월 20일에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당군은 다음 날 뜻밖의 사태를 만났다.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원군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당 태종은 침착하게 고구려군을 유인해 섬멸했다. 안시성의 군민은 한숨 돌리는가 했다가 참담한 심정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도 안시성만큼은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매일 6, 7차례나 공격을 가했지만 소용없었고 포격을 가해 성루를 부숴도 곧 목책으로 보수하는 등 안시성의 저항은 빈틈이 없었다. 당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토산을 쌓았다. 토산을 두 달 동안 피땀 흘려 쌓았는데, 완성이 코앞일 때 고구려군이 뛰쳐나와 토산을 점령해 버렸다. 고구려군이 토산 안에 참호를 만들어 지키니 당군이 사흘간 맹공을 펼쳤지만 결국 이길 수가 없었다. 9월 18일,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자 당 태종은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했다. 3개월간 펼쳐진 공방전에서 안시성주가 승리한 것이다.

전투 내용은 자세히 전해지지만 이 승리를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안시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 아니다. 이 이름은 명나라 때 소설가 웅대목이 쓴 ‘당서지전통속연의’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 이 소설에는 양만춘 이외에도 고구려 장수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 이름 중 몇 개를 적어보면 이렇다.

백면낭군, 도로화적, 달로게리, 대대로, 한계루, 김정통, 왕다구, 아력호, 흑수환.

벼슬이나 부족명을 사람 이름인 줄 알고 쓸 정도이다. 조선 시대에 이 소설책을 본 사람은 없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탓에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생겨나고 말았다. 가짜 역사책인 ‘환단고기’에도 양만춘과 추정국(역시 이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의 이름이 실려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정보를 믿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식민사학자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사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반지성적인 행태는 사라질 것이다.

이문영 역사작가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