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시아연구원. 대형 스크린에 띄워진 인공지능(AI) 챗봇은 자신을 하영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77·외교학 전공)라고 소개했다. 하 교수의 희수연(喜壽宴)을 맞아 그의 제자들은 생성형 AI 모델 ‘GPT-4o’(포오) 기반으로 제작한 AI를 선물로 준비했다. 동아시아 국제정세 분야 석학인 하 교수가 펴낸 단행본 13권, 140여 편의 논문, 기고문 등을 전부 학습한 ‘하영선 A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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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한 달 만에 '학자 평생연구' 완전히 학습
참석자들은 하영선 AI에 학술적 내용뿐 아니라 외교적 현안 등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북핵에 대한 입장이 뭔가’라는 질문에 AI는 “생존권, 발전권, 통합억제 시스템 등 3가지 차원으로 구분한 뒤 답변하겠다”며 하나씩 설명한 뒤 “북한의 핵 보유 비용을 극대화해서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 교수의 평소 지론과 일치하는 답변이었다.
하영선 교수 제자들이 그의 저작물을 학습시킨 AI 챗봇을 제작해 시연하고 있다. 사진 동아시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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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을 요구하는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하 교수 학문에서 중요한 개념이 뭔가’라고 묻자, “국제 정치의 다차원성을 설명하는 ‘복합세계정치’와 ‘늑대거미 모델’이 핵심”이라고 답했다. 하 교수의 저작물을 2000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AI에 각각 따로 학습시켜 젊은 하 교수와 노년의 하 교수가 AI로 대리 토론하는 것도 가능했다. 나이가 들며 조금씩 바뀌었던 가치관의 차이를 AI가 잡아냈다는 의미다.
글이 아니라 하 교수가 말하는 목소리가 담긴 동영상을 학습한 AI도 있었다. 음색이나 “음…” 하면서 뒤를 내리는 말 습관까지 현실의 하 교수와 유사했다. 함께 듣던 제자들은 “교수님 특유의 ‘쪼’(말투)가 실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다. 지금보다 젊을 때 목소리와 더 비슷해 놀랍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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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선 "AI 안 써도 망하고, AI만 믿어도 망할 것"
하영선 교수는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AI를 잘 활용하면 동아시아연구원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등 세계 선두권의 싱크탱크와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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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자신의 AI를 본 하 교수는 처음엔 미소를 띠며 지켜보다가 차츰 진지한 표정이 됐다. 그는 “북한 문제는 90% (내 견해와) 비슷한 것 같고, 미중관계는 60~70% 정도다. 어떻게 묻는지에 따라 답변 수준이 다르니 질문하는 실력이 중요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AI를 학습시킨 과정은 하 교수의 서울대 외교학과 제자인 공훈의 고도화사회이니셔티브 대표가 맡았다. 공 대표는 “같은 내용이라도 입력 순서, 자료의 구조화 여부에 따라 AI 성능 격차가 정말 크다. 한 달 동안 AI 6개를 제작해 가장 나은 5번째 모델을 들고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정인의 저작물에만 기반해 답을 내놔야 해서 다른 자료는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도 했다.
하 교수의 지식을 통째로 흡수한 AI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는 배영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냈다. 하 교수가 “(원로교수들이 받는) 초상화 같은 아날로그 선물은 준비하지 말라”고 했고 그렇다면 미래 지향적인 뭔가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배 교수는 “AI가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접점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모인 하 교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교수였다. 이들은 AI가 지식공유 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가능성에 관심을 가졌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예를 들어, 북한 오물풍선이 날아왔을 때 외교 전문가의 의견이 궁금하면 바로 AI에 물어보고 참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뢰도 제고 등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영선 교수는 “앞으로 세상은 저걸(AI) 안 써도 망하고, 저것만 믿어도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철웅 기자 kim.chulwo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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