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에트나 와인
카티아 크라프트와 모리스 크라프트 부부 이야기다. 화산에 대한 저술과 연구와 영상을 남긴 부부는 죽기 전까지 화산이 분화하는 장면을 찍었고, 그래서 자신들의 죽음도 남겼다. 운젠 화산을 포함해 부부가 남긴 화산 탐방 영상을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화이트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이 와인이 화산 와인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동부. 한 포도밭 너머로 활화산인 에트나가 보인다./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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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세상에는 ‘화산 와인’이라는 게 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화산 토양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들었다는 와인을 마시며 나는 이 세상에 화산 와인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화산의 검은 토양에서 난 포도로 만든 와인이 화산 와인이다. 이 검은 화산 토양은 유난히 비옥하다고 한다. 토양만 남다른 게 아니라 화산도 산인지라 땅의 경사도도 달라진다. 평지가 아닌 테라스 식으로 개간한 밭에서 포도를 심어야 하고, 고도가 올라갈수록 강우량이 많아진다. 또 일교차도 커지는데 모두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한 조건에 해당한다. 사람에게는 가혹하지만 포도에게는 좋은 일이다.
나는 검은 토양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제주 당근을 먹고 그렇게 되었다. 당근은 제주 당근과 비제주 당근으로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만큼 제주 당근은 압도적으로 맛있다. 제주의 검은 흙에 심긴 당근이라 그런 맛이 난다고 들었다. 제주에 간다면 한라봉 주스 대신 구좌 당근 주스를 드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에 화산 와인의 검은 토양 이야기를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화산 와인을 마셨을 때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토양이 남다른 것은 알겠는데,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내 이해 영역 밖의 와인이었기 때문이다. 적도에 가까운 위도 대에서 어떻게 이런 산미가 좋으면서 미네랄리티가 있는 와인이 나오나 싶어서. 와인을 좀 드시는 분들이 좋아하는 특정 위도대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할 만큼 나도 적도와 상당히 떨어진 위도대, 하지만 북극으로는 너무 가깝지 않은 위도대의 와인을 골라 마셨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마셨던 적도와 가까운 편인 화산 와인은 내가 선호하는 위도대의 섬세한 맛이 났던 것이다.
그 비밀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위도의 부족함을 고도가 상쇄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런 와인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위도가 낮을수록 고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제주처럼 화산 섬인 시칠리아 와인이 명성을 얻은 비밀은 고도에 있다고 했다. 시칠리아의 62%가 언덕이고 24%가 산이다. 화산 와인의 본산지인 에트나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이 있는 곳이다. 그걸 알고 나서 에트나 와인을 찾아 마시기 시작했다.
화산 하면 에트나고, 에트나의 와인이 좋아서다. ‘에트나’라고 할 때의 울림도 좋다.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로 한 달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가려다 못 간 곳이 에트나다. 화쇄류가 쌓인 검은 산이 보고 싶었다. 내가 밟아본 산과는 다른 질감일 그곳을 발로 느끼고 싶었다. 냄새도 궁금했다. 그래서 어딘가에 남아 있을 유황 냄새를 맡으며 검은 산을 트래킹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화산 와인이라는 장르를 알았다면 반드시 에트나의 검은 산을 걷고 나서 에트나 와인을 마셨을 텐데 그때는 화산 와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에트나의 화산 활동이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신들의 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로마 사람은 그 산을 불카누스(Vulcanus)라고 불렀고, 영어에서 화산이라는 뜻의 볼케이노(volcano)의 유래다. 로마 사람은 지금의 화산을 ‘에트나’로 불렀다. 에트나는 시칠리아의 북동쪽에 위치한 산이며 동시에 화산을 뜻하는, 그러니까 고유명사이며 동시에 보통명사 둘 다였던 것이다. 내가 이래서 에트나 와인을 마신다. 에트나 와인을 마시는 것은 곧 화산을 마시는 것이라서.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화산이라는 뜻으로 쓰던 단어를 마시는 것이기도 해서.
내가 본 화산학자 부부의 다큐멘터리 제목은 ‘화산만큼 사랑해’다. 보기 전에는 ‘Fire of Love’라는 원제를 너무 바꾸지 않나 싶었지만 보고 나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아무래도 카메라 앞이니 평소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부부는 화산을 열렬히 사랑하고 삶 또한 열렬히 사랑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보는 얼굴에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아 의아할 지경이었다. 화산 다큐를 보겠다고 그걸 보던 나는 어쩌다 보니 부부애를 다룬 다큐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화산이 분화하는 걸 보면서 카티아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먹는 이야기라는 걸 보고 난 크게 웃었다. 40kg이 안 되게 보이는 깡마른 여자는 식욕이 없어 보여서 더 그랬다. 아니면 먹는 이야기만 하고 먹지는 않는 건가도 싶었고. 나는 카티아가 프랑스인답게 와인도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그가 와인을 좋아한다면 분명히 에트나산에 올라 에트나 와인을 마셨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아쉽게도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카티아와 모리스가 운젠 화산에서 죽은 게 1991년인데 에트나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한 게 1990년대라서다. 그리고 화산 와인이라는 게 있다고, 에트나 와인이라는 게 있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게 2000년대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화산 와인’이라는 개념은 부부가 죽고 나서 생긴 것이다.
화산의 위험과 함께 화산 토양의 잠재력을 널리 알린 부부가 그 잠재력을 존중해 만든 와인을 마셔보지 않았다는 게 매우 애석하다. 마셨다면 세상에서 화산 와인의 맛을 가장 깊이 느꼈을 사람들인데. 나만 해도 에트나 와인이 맛있는 건 이런저런 맥락들이 떠올라서다. 화산의 연기가 떠올라서다. 또 헤파이스토스가 떠올라서다. 에트나라는 불구덩이에서 신의 무기를 담금질하고 있을 헤파이스토스를 떠올리면 쩡쩡하는 굉음이 들리며 에트나 와인의 맛이 더 각별한 것인데. 그들의 혀끝으로는 얼마나 광대한 것들이 지나갔을지!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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