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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목)

‘해병대의 아버지’ 해상인민군 몰려 총살…74년 만에 명예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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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46년 9월15일 조선해안경비대 진해기지를 방문한 김구 선생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중위였던 고 이상규 소령은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다. 이상규 소령은 생전에 김구의 노선을 지지했다고 한다. 이동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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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창설을 최초 제안한 인물로 알려졌으나, 해상인민군 사건에 연루돼 한국전쟁 기간 수감 중 총살당한 고 이상규(1920~1950) 소령이 조작된 범죄사실로 영장 없는 불법 체포와 장기 불법감금을 당한 것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결과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11일 제80차 전체위원회를 열어 고 이상규 소령이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데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는 유족에게 사과와 함께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의 명예 회복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고 이상규 소령은 일본 오사카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선박을 조정할 수 있는 ‘을종 일등운전사면장’을 취득한 뒤 1946년 해군에 입대했다. 해군 복무 중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해군 임시정대지휘관으로 진압 작전에 참전했다. 이후 실전 경험을 토대로 해군함정의 무장을 강화하고 육전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실전보고서를 작성하여 해군참모총장에게 건의했는데,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에 기여했다고 한다. 육전대란 육상 및 해상에서 전투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주로 상륙 작전을 수행하는 군사 조직으로 현재의 해병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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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9세 때의 고 이상규 소령. 이동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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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에 따르면, 고 이상규 소령은 항해술 등 현장 실무능력이 뛰어났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관료화된 해군 지휘부와는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정치 노선을 지지했으며, 비리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여순사건 뒤 해상봉쇄 작전 때는 순천에서 잡혀 와 반란군으로 몰려 총살당할 수 있는 어부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역임) 등 만주국 출신 장교들과는 갈등을 빚었는데, 결국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



그는 1948년 10월30일 해군 ‘충무공정’ 정장으로 해군 진해기지에 복귀한 이후 “정당한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해상인민군에 가입해 같은 조직 수괴로부터 비밀서신을 수령했다”는 혐의 등으로 1948년 12경 방첩대에 연행돼 해안경비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24일 마산 육군헌병대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총살을 당한 사실은 1기 진실화해위에서 확인된 바 있다.



고 이상규 소령의 아들인 이동주(77)·이동춘(75)씨는 “1기 진실화해위를 통해 부친의 사망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나 △여순사건 직후 해상인민군에 가입했다는 누명을 쓰고 불법 체포되어 고문당하는 등 형무소 수감 중 희생을 당했고 △여순사건 진압에 참여한 후 육전대 필요성 등이 담긴 실전보고서를 작성·건의하여 해병대 창설에 기여했으나 해병대 역사가 왜곡·은폐됐다며 각각 2020년 12월(이동주)과 2022년 1월(이동춘)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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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이상규 김영희 부부의 결혼사진. 이동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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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는 범죄조작 의혹과 관련해 당시 판결문 등 관련자료 조사 결과, 고 이상규 소령이 가입했다는 해상인민군의 실체 또는 존재 여부를 인정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해상인민군 가입’ 및 ‘조직 수괴로부터 비밀서신 수령’ 혐의 등은 피해자 근무 시간·지역과 근무 이력 등 객관적 사실에 견줬을 때 범행일자와 그 내용에 명백한 오류가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마산형무소 명적표(재소자 신분장의 일종)의 ‘영장 발부’가 모두 공란으로 돼 있고 영장이 발부됐음을 추정할 만한 기록조차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당시 법원이 발부한 사전 또는 사후영장 없이 체포·감금되어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으로 판단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하더라도 수사기관이 구속할 수 있는 최장기일인 40일보다 39일을 더 초과한 79일이나 감금되어 있었기에 제헌헌법 관련 조항에 의하더라도 중대한 인권인 신체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보았다. 고문 등 가혹 행위에 관해서는 “마산형무소에 첫 면회를 갔을 때 고문을 너무 당해 찾아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 부인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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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상규 소령이 1942년 딴 을종일등운전사면장. 이동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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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진실화해위는 신청인의 신청 취지 중 해병대 역사 왜곡과 은폐 여부에 대한 조사는 진실규명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해병대 창설의 최초 제안자와 관련해서는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던 신현준(1915~2007)과 공정식(1925~2019)이 본인의 업적으로 주장해왔다.



한국전쟁 당시 숙청당한 군인들에 관해 연구해온 신기철씨는 12일 한겨레에 “중앙정보부의 ‘대남공작사’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에는 이상규 소령이 해병대의 창설 필요성을 주장하는 실전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사실 또는 정황이 나온다. 신현준과 공정식이 해병대 창설을 제안했다는 근거는 본인들 주장 외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 이상규 소령의 둘째 아들 이동춘씨는 1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진실규명까지 오래 기다렸다.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 권선징악이 이뤄지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씨는 이어 “여순사건 직후 해로봉쇄와 육전대 제안 실전보고서 등 부친이 세운 전공을 다른 장교들이 탈취한 것도 억울하다”고 덧붙였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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