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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여왕도 즐긴 폭탄주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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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본 블렌디드 위스키 '히비키' 하이볼.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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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링된 길쭉한 유리잔에 큼지막한 얼음 넣고 위스키 30밀리. 그 옆으로 조심스럽게 탄산수를 가득 붓고, 바 스푼으로 얼음 한번 들썩. 취향에 따라 레몬에 가니시까지. 흔히 알려진 위스키 하이볼 레시피입니다. 오늘날 하이볼은 증류주에 무알코올 음료를 섞은 것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즉, 위스키뿐만 아니라 진에 토닉워터, 버번에 콜라를 타도 이를 모두 하이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무작정 취하기 위해 부어라 마셔라 하던 음주 문화가 변하고 있습니다. 삼겹살에 소주, 치킨에는 맥주라는 공식도 깨진 지 오래입니다. 알코올의 절대 양보다는 맛이 더 중요한 시대, 그 틈새로 하이볼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둥지를 텄습니다.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칵테일 중 하나인 하이볼. 단순한 제조법과는 달리 그 역사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하이볼의 기원

영국인들은 일찍이 탄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탄산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병을 개발했고 1662년 최초의 스파클링 와인을 탄생시켰습니다. 효모의 발효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산이 발생했던 것이죠. 1767년에는 영국의 화학자인 조셉 프리스틀리가 이산화탄소를 물에 주입해 탄산수를 개발합니다. 우연이 필연이 됐고, 영국 상류층의 사랑을 받던 스파클링와인은 자연스럽게 브랜디(Brandy : 포도주를 증류한 것)에 탄산수를 부어 마시는 형태로 발전합니다. 하이볼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탄산수의 탄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초,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때 내려졌던 ‘대륙봉쇄령’에 의해 브랜디 수입에 차질이 발생합니다. 심지어 1863년에는 영국 필록세라 진드기가 유행하면서 유럽 전역의 포도밭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포도 관련된 모든 업종에 암흑기가 찾아온 것이죠. 하지만 브랜디가 사라졌지, 술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1837년부터 64년간 영국을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 그는 스코틀랜드를 지상 낙원으로 표현했고 평소 보르도산 포도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셨습니다. ‘폭탄주’는 ‘빅토리아 여왕의 술’로 불리면서 당시 저평가됐던 스카치를 영국 상류사회로 끌어냈습니다. 여왕의 취향에는 늘 대중의 이목이 쏠렸던 것이죠. 덕분에 영국인들은 자연스럽게 브랜디 대신 스카치를 선택할 수 있었고 하이볼의 전신 격인 ‘스카치 앤 소다’가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스카치 앤 소다로 불리던 음료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이볼’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하지만 하이볼도 ‘원조 맛집 논란’처럼 원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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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화물열차가 미국 뉴햄프셔 화이트 필드를 통과하기 위해 대기 중인 모습. 열차의 진행 속도나 정지 등의 운행 조건을 알려주는 장치인 공(Ball)이 매달려 있다. /Ronald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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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이볼이 19세기 미국 철도 산업에서 유래됐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당시 열차의 진행 속도나 정지 등의 운행 조건을 알려주는 장치가 공(Ball)이었습니다. 기관사는 철도 교차로나 역에 매달린 공의 높이를 보고 열차의 속도를 판단했던 것이죠. 공이 높이 올라가 있으면 해당 역을 정차 없이 최대 속도로 통과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공이 낮으면 ‘멈춤’을 의미했습니다. 역무원이 “하이볼!”이라고 외치면 선로가 비었으니 전속력으로 달려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겠지요. 하이볼은 속도와 관련 있는 용어로 신속함을 표현하는 속어로 사용됐던 것입니다.

기차 식당칸에서 준비됐던 음료는 흔들림에 강해야 했습니다. 증기기관차의 바퀴가 둔탁한 레일에 부딪히는 덜컹거림 정도는 견뎌야 했던 것이죠. 바텐더들은 점점 더 깊은 잔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품이 많이 드는 섬세한 칵테일보다는 신속하게 제조할 수 있는 음료를 선호했습니다. 위스키 앤 소다는 필연적인 선택이었죠. 그때 잔 속에 떠 있던 얼음이 철도 교차로에 높이 올라간 공의 모습이랑 비슷하다고 하여 하이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이볼이 스코틀랜드의 골프 클럽에서 탄생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골프를 칠 때 마시던 음료가 스카치 앤 소다였습니다. 경기 초반에는 공이 어느 정도 뜻대로 맞았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취기 때문에 공이 자꾸 위로 올라가서 ‘하이볼'이라고 지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1892년 듀어스(Dewar’s)의 창립자 아들인 토미 듀어가 최초의 하이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가 뉴욕의 바에서 위스키에 얼음과 소다수를 넣어달라고 주문했는데 바텐더가 너무 작은 잔을 준비했던 것이죠. 토미는 얼음과 소다수를 풍성하게 넣을 수 있는 긴 잔을 요구했고 당시 술을 의미하는 볼(Ball)과 긴 잔이 합쳐져 하이볼이 탄생했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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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크리스 로울러(Chris Lawlor)의 저서 ‘더 믹시콜로지스트(The Mixicolo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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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볼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1895년 크리스 로울러(Chris Lawlor)의 저서 ‘더 믹시콜로지스트(The Mixicologist)’에서 등장합니다. ‘얇은 에일 잔에 얼음 한 덩어리를 넣고 탄산수를 잔 윗부분에서 1인치 이내로 채운다. 지거(Jigger:계량컵) 반 정도 양의 브랜디 또는 위스키를 띄워준다.’ 이는 영락없는 하이볼 제조법입니다. 1894년 ‘인도에서 온 나의 친구’라는 연극에서 극 중 배우가 하이볼이라는 음료를 언급하기도 했으나 로울러가 최초로 이를 문서화시켰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꽃 피운 하이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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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위치한 하이볼 전문점. 산토리 위스키의 '가쿠빈' 모습.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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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의 폭탄주에서 시작된 음료는 미국에서 이름을 얻고 일본 문화에 정착합니다. 산토리 위스키의 아버지 격인 도리이 신지로가 1937년, 하이볼 유행의 대표 기주인 ‘가쿠빈’을 출시한 것이죠. 초창기 가쿠빈은 알코올 도수 43%의 블렌디드 위스키였습니다. 사케 같은 낮은 도수의 발효주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는 독하게 느껴질 수 있었겠죠. 하지만 위스키에 물을 타서 도수를 낮춰 마시는 미즈와리와 함께 하이볼은 자연스럽게 식중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탄산수와 얼음이 높은 도수의 증류주를 마시기 편한 음료로 희석해줬기 때문입니다.

하이볼은 일본의 선술집인 이자카야에서 불티나게 팔렸고 일본 위스키는 본격적으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는 마트나 편의점 등에서도 손쉽게 RTD(Ready to drink: 바로 마실 수 있는) 캔 음료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유행이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한국까지 넘어왔습니다.

◇하이볼 기주 선택법

하이볼은 기주에 따라 그 방향성이 바뀝니다. 본인이 어떤 맛을 선호하는지만 알아도 선택은 쉬워집니다. 그 중 딱 3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훈제나 장작 타는 맛을 원한다면 피트 위스키. 상큼한 열대과일 계열의 느낌을 내고 싶다면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된 위스키.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 계열의 고소함을 느끼고 싶다면 셰리 위스키를 선택하면 됩니다.

단, 셰리 위스키는 하이볼과의 궁합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자칫 셰리가 가진 안 좋은 맛들이 탄산수와 만나 증폭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셰리 오크통이 가진 유쾌하지 않은 나무 맛이나 어중간한 포도의 쓴맛 등이 대표적입니다. 반면, 탄산수와 블렌디드 위스키와의 궁합은 좋은 편입니다. 블렌디드 위스키 특유의 씁쓸한 곡물 맛을 탄산수가 말끔하게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조니워커 계열의 블렌디드 위스키가 하이볼 기주로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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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위치한 하이볼 전문점. 자잘한 느낌의 밀도감 있고 부드러운 탄산수가 인상적이다. /김지호 기자


기주만큼 중요한 게 탄산수와 얼음입니다. 얼음은 최대한 크고 단단한 게 좋습니다. 하이볼은 제조와 동시에 얼음이 녹으면서 술맛이 묽어집니다. 몰트 바에서 흔히 투명하고 큼지막한 얼음을 쓰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탄산수는 청량감이 강한 제품이 좋습니다. 자잘한 느낌의 밀도감 있고 부드러운 탄산수가 제일 좋겠지만 ‘싱하’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이볼은 칠링된 잔에 얼음과 위스키, 탄산수 붓고 바 스푼으로 휘저어 서빙되는 순간이 가장 맛있습니다. 바텐더들도 하이볼만큼은 빠르게 마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너무 비싼 위스키를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이볼은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쉽게 타 마시는 것이 묘미입니다. 너무 비싼 위스키로 하이볼을 타면 생각만 많아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여러 가지 맛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피트는 하이볼에서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피트 하이볼에 가니시로 레몬 대신 검정 통후추를 북북 갈아서 넣어보세요. 순후추가 아닌 반드시 통후추여야 합니다. 한 모금 맛보는 순간 하이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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