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시간의 덫에 빠진 수사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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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폰이라 그랬다면서?" 장기미제 숨은 원인, 멍하니 6개월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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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철 디자인기자 /사진=임종철 디자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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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게 있나요. 저희도 마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디지털포렌식 절차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드는 것 같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최근 사건 수사에서 핵심 증거로 빠지지 않는 디지털 증거를 조사·분석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건 처리가 줄줄이 지연된다는 지적이 이어지지만 검찰 분위기는 해법 모색에 지치다 못해 무기력에 빠진 듯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디지털증거 분석 기술력의 수준이나 예산의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게 검찰의 하소연이다.
기업 서버뿐 아니라 개인용 PC와 스마트폰 보안도 고도화한 데다 데이터 용량도 빠르게 늘면서 증거물 1건을 분석하는 데 드는 시간 자체가 늘었다. 재경지검의 한 포렌식수사관은 "USB나 스마트폰을 꽂으면 모든 정보가 촤르륵 나오는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며 "포렌식 기기가 아무리 좋더라도 결국 데이터는 데이터가 저장된 기기의 출력속도에 따라 나오기 때문에 일단 데이터가 출력되는 것만도 멍하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장상황도 변수다. 암호를 푸는 데 예상보다 오래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형사부는 최근 이틀이면 충분할 것으로 봤던 압수현장에서 암호를 푸는 데 애를 먹어 5일 넘게 압수수색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기업 서버는 대부분 외국에 있다보니 해외 관리자에게 영장을 보내 보안 해제를 요청해도 시차 때문에 응답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어렵사리 데이터를 확보해도 '참관'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검찰은 참여권 보장을 위해 사건 당사자가 입회한 가운데 압수물 선별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검찰 관계자는 "포렌식 절차에서는 당사자와 변호인이 참여해 자료를 한 건씩 꺼내보면서 '범죄혐의와 관련성이 있느냐'를 따지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참관실이 태부족하다는 점이다. 서울중앙지검과 서울남부·동부지검을 제외하면 대부분 참관실이 1개에 그치다보니 대기줄이 길다.
참관실 대신 영상녹화실 등에서 선별 작업을 진행하려면 사건 당사자와 변호인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동의가 수월하게 이뤄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서울남부지검에서는 최근 이런 이유로 압수수색한 이후 6개월 넘게 사건이 방치된 경우도 있었다.
검찰이 궁여지책으로 80여명의 포렌식수사관 중 20명을 참관 전담 수사관으로 지정했지만 여전히 인력이 부족하다.
검찰 한 인사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방법이 없지 않냐"며 "어떻게든 압수물 분석이 끝나면 검사들이 밤을 새서 자료를 볼텐데 포렌식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볼 게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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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봐라" 말 나오는 이유…수사에, 재판 지연까지 기업들 '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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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한별(머니S)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된 '회계부정·부당합병' 관련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머니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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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공격적인 사업 계획이나 투자 안건이 올라오면 '삼성 좀 봐라'라고 합니다."
최근 만난 재계 한 인사의 얘기다. 삼성물산 부당합병 혐의 사건 이후로 재계에서 웬만큼 파격적인 공격 투자는 자취를 감췄다는 뜻이다.
삼성물산 부당합병 의혹 사건 재판은 2020년 10월 첫 공판부터 올 2월 무죄 선고까지 1심에만 3년 5개월이 걸렸다. 오는 27일부터는 다시 2심 재판이 시작된다. 이 인사는 "수사는 그렇다 치고 삼성만한 기업이 재판에만 이렇게 3년 넘게 시달리는데 어느 기업이 예전 같이 과감한 사업 계획을 짤 수 있겠냐"고 말했다.
삼성만이 아니다. '국정농단·경영비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2016년 6월 검찰수사를 시작으로 3년 4개월이 지나서야 사법 리스크가 해소됐다.
재계에서는 "요즘 재판은 기본이 3년"이라는 한숨이 나온다. "길어지는 재판이 최대 리스크"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다.
재판이 늦어지면 기업 경영 차질은 피할 수 없다. 반도체업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의 글로벌 경영 차질을 최근의 반도체 경쟁력 부침 원인으로 꼽는다.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커지는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 타격 등 무형의 손실도 무시할 수 없다.
재판 지연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선고까지 고등법원은 11.1개월, 지방법원(항소부)은 10.8개월이 소요된 것으로 집계됐다. 2018년 말 기준 고법 재판에 8.1개월, 지법은 7.8개월이 걸린 데 비해 처리 기간이 크게 늘어난 셈이다. 길어진 수사 기간에 재판 지연까지 겹칠 경우 기업 총수는 수년간 사법 리스크를 안고 가야 한다.
재판부의 고심 역시 깊다. 사건이 복잡해지고 상속 분쟁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민사부, 형사부 법관 모두 장기화한 재판에 시달린다. 특히 기업과 노동자가 다투는 노동 사건의 경우엔 3심까지 이어지는 게 부지기수라 재판이 최종심까지 끝나려면 10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서울 소재 법원에서 일하는 한 부장판사는 "사건이 조금만 복잡하면 원고, 피고, 증인이 많게는 몇 백명이 되기 때문에 재판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준영 기자 cho@mt.co.kr 정진솔 기자 pinetre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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