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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장태완 "대가리 뭉개버린다"…전두환 칠 기회 3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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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더중플 - 전두환 비사

한국의 현대사를 기억하는 상징적 날짜로서 세대와 이념의 분기점은 1950년 6·25와 1980년 5·18입니다. 둘 다 현대사의 비극적 총소리입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은 3번의 총소리(10·26, 12·12, 5·18)와 함께 역사의 무대로 ‘돌진’합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에선 이 문제적 인물을 탐구하는 시리즈 ‘전두환 비사’(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18)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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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의 총소리, 장군이 대통령 되다



중앙일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중 앞에 처음 나타난 장면. 1979년 10월 28일 전두환 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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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전엔 권력이 총구에서 나왔다. 세 차례의 총소리 끝에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었다.

첫번째 총소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렸다. 청와대 앞 궁정동 소재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등장했다.

두번째 총소리는 1979년 12월 12일 한남동에서 울렸다.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의 부하들에게 강제연행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2·12로 전두환은 무력(군권)을 장악했다.

세번째 총소리는 1980년 5월 전남 광주 금남로에서 울렸다.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수부대의 발포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수부대가 전남도청에 재진입한 27일 국무회의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을 통과시켰다. 전두환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면서 정치권력까지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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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2757



치밀했던 전두환, 우유부단했던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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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합동수사본부에 강제연행된 정승화 전 참모 총장이 수갑을 찬 채 헌병에 이끌려 재판을 받으러 가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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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총소리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총싸움은 두번째 12·12였다.

사실 10·26은 전두환 장군에게도 돌발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기 전 임명한 보안사령관이란 직책 때문에 저절로 수사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12·12는 전두환에게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당시 비장한 심경은 전두환 회고록에 담겨 있다. 전두환은 12·12 전날 밤 온 가족을 모아놓고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

“시해범의 공모자(정승화 참모총장)를 수사하려다 내 자리와 명예, 어쩌면 그 이상까지 걸어야 할 수도 있다. (중략)그러나 역사적 임무를 비겁하게 포기할 수 없다.”

전두환은 정승화를 김재규와 공범으로 간주했다. 물론 김재규는 조사과정에서 ‘정승화는 사전에 암살계획을 모른 채 내 초대를 받아 궁정동에 와 있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김재규와 가까웠던 정승화가 김재규와 사전에 교감하고, 사후 수사와 재판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의심을 했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은 군사재판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참모총장에 계속 머무는 경우, 김재규가 사형을 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범 처형을 자신의 운명이라 느꼈다.

물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도 정승화는 제거되어야 했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은 막강했다. 그래서 실패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거사였기에 전두환은 철저한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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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문민정부 시절 12·12 및 5·18 관련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만난 당시 군 수뇌부. 왼쪽부터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노재현 국방장관, 이건영 3군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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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두환의 승리는 예정돼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두환의 ‘멸사돌진(滅死突進.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을 통제할 수 있는 상급자가 없었다. 군 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은 우유부단했고, 노재현 국방장관은 도망 다니느라 보이지 않았고, 정승화 참모총장은 전두환의 쿠데타를 제보 받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12일 밤 상황이 터지자 육군본부 지휘부는 우왕좌왕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 혼자 병력동원을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어느 부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태완은 병력을 동원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부하에게 체포되어 보안사로 끌려갔다.

반면 전두환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병력 동원에 대비해 사조직 핵심세력들을 한자리(경복궁 30단)에 모았다. 전두환의 하나회 후배인 공수여단장들은 전두환의 명에 따라 병력을 인솔해 거침없이 돌진, 육군본부와 국방부 그리고 중앙청을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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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하루 전 “다 모여라” 전두환 가족 만찬서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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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대가리 뭉개버린다”…전두환 칠 기회 3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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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인간 취급 안한다…12·12 곳곳서 ‘돌진’ 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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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총소리에 뒷담 넘었다…쿠데타에 3번 숨은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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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개입이 12·12 성패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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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전방부대 시찰에 나선 위컴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쿠데타 초기 신군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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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의 성패를 가른 결정적인 변수는 미국이었다.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먼저 움직인 것은 미군의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6·25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모든 지휘권을 넘겼지만, 5·16 직후 박정희는 미국과의 협상과정에서 ‘예외 조항’을 만들었다. 시위나 소요사태, 간첩 소탕 작전 등 국내 문제에 동원할 수 있는 무력(공수부대)은 미군 동의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육군본부가 전두환을 제압하기위한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미군의 사전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미군은 ‘날이 밝기까지 병력 동원 안된다’며 반대했다. 야간전투로 희생이 많아질까 우려했다. 미군 벙커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육군 지휘부에 ‘병력동원 금지’를 지시했다.

그러나 날이 밝기 전에 상황은 끝났다. 13일 새벽 5시 최규하 대통령이 정승화 체포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12·12가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췄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국 CIA 책임자였다.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은 13일 새벽 3시 신군부가 서울 도심을 장악하자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자청했다. 신군부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셈이다. 전두환은 ‘노재현 장관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브루스터는 20분 뒤 다시 전화해 ‘노재현 찾았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라고 설득했다'고 연락해왔다. 곧이어 노재현이 보안사에 들러 전두환으로부터 결재서류를 받아 총리공관으로 가 최규하 대통령의 사인을 받아왔다.

미국은 한번은 군, 다른 한번은 정보기관(CIA)을 통해 12·12의 운명을 갈랐다. 미국의 두 차례 개입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려졌다. 미국 관계자들의 회고록과 증언, 그리고 미국정부 비밀문서의 해제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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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특수부대가 전두환 제거? 동생 전경환 집으로 숨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8941



권력은 총을 뽑고, 시민은 피를 뿜다



마지막 총소리는 민족사의 비극이었다. 본격적으로 정권장악에 나선 신군부가 저항하는 광주 시민을 향해 일방적으로 뿜어 댄 집단발포였다. 전두환 비사 시리즈는 28일자부터 금남로의 비극을 팩트 중심으로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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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박정희의 계시 같았다…전두환 홀린 허문도 등장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484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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