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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글 쓰고 싶다” 마지막 말 남기고 떠난 시단의 거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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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4년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내면서 본지와 인터뷰했던 고(故) 신경림 시인.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시를 꾹 눌러 담았고, 세상을 뜬 친구들을 추억했다. 그렇게 지난 삶을 되돌아본 시집이다. 당시 인터뷰에서 시인은 “나이가 든다고 달관하는 게 아니라 자꾸 옛날로 돌아가면서 시를 쓴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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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시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한국 현대 문학사(史)에 한 획을 그은 ‘리얼리즘의 개척자’이자 ‘민중적 서정시인’. 시 ‘가난한 사랑노래’ ‘농무(農舞)’ ‘목계 장터’ 등으로 잘 알려진 원로 시인 신경림(89)이 22일 별세했다. 유족과 문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 시인은 이날 오전 8시 16분 일산 국립암센터 호스피스병동에서 숨을 거뒀다.

원로 시인의 마지막 말은 ‘글 쓰고 싶다’는 중얼거림이었다고 한다. 차남 신병규씨는 본지와 통화에서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병상에서 글을 쓰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글을 안 쓰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는 의식이 없어 말씀을 아예 못하셨어요.” 반세기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며 서민들의 슬픔과 한(恨), 굴곡진 삶의 풍경 등을 친근하게 노래했다.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를 졸업하고, 동국대 영문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예지 ‘문학예술’에 시 ‘갈대’ 등을 발표했다. 정지용 시인의 맥을 잇는 이한직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소설가 이호철·선우휘, 평론가 이어령·유종호 등이 ‘문학예술’ 출신이다. 서정주 시인으로 대표되는 ‘순수시’ 계열과 차별화된다. 김사인 시인은 “전통과 토착에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고, 합리성을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열린 지적 추구 정신을 갖는 우리 문학의 중요한 맥을 계승해온 선배 시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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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고(故) 신경림 시인의 빈소가 마련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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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시인은 1973년 시집 ‘농무’를 월간문학사에서 자비로 출판했고,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이에 창작과비평사는 1975년 시 17편을 추가해 시집 ‘농무’를 ‘창비 시선(詩選)’의 첫 시집으로 냈다. 그 뒤로 창비와는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실천문학사에서 낸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1988)를 제외하곤 시집 ‘새재’(1979), ‘달 넘세’(1985), ‘쓰러진 자의 꿈’(199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뿔’(2002), ‘낙타’(2008), ‘사진관집 이층’(2014) 등 대부분의 시집을 창비에서 냈다. 지난달 창비 시선 500권을 기념한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은 그의 시 ‘그 여름’의 한 구절이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수감 후 석방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7년 전 발병한 대장암이 최근 재발하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신 시인은 2017년 대장암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과 항암·방사선 치료를 받고 완쾌하다시피 했다. 신 시인의 제자이기도 한 서홍관 국립암센터원장은 “최근 병원을 찾으셨는데 대장암이 재발했고, 폐까지 전이된 상태인 걸 확인했다. 2주 전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하고 빠르게 건강이 나빠졌다”고 했다. 서 원장은 1981년 서울대 의대 본과 3학년 문예반 시절, 신 시인을 초청해 강연을 들은 후 신 시인을 은사로 모셨다. 신 시인의 격려로 등단까지 한 각별한 인연. “돌아가신 직후 손을 잡아 드렸는데 손이 얼마나 따듯했는지….”

문인들은 그를 ‘따듯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시영 시인은 “리얼리즘 시를 쓰면 무서울 것 같다고 선입견을 갖지만, 굉장히 따듯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한국시인협회장 김수복 시인은 “우리 시를 역사와 현실에 가까이 끌고 오신, 우리 시의 큰 산맥이었다”며 “후배들에게는 너무나 자상한 선배였다”고 했다. 도종환 시인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못난 사람들을 품어 안는 시를 써온 시단의 거목이었다”고 했다.

유족으로 아들 병진·병규씨, 딸 옥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는 주요 문인 단체가 함께 하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4일간 치러진다. 발인은 25일 오전 5시 30분.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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