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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뉴욕다이어리]영화 록키와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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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에 자리한 한 동상. 이 앞은 항상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겠다며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최근 주말 휴일을 맞아 방문한 이 동상 앞에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100여명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동상은 다름 아닌 영화 '록키'의 주인공인 록키 발보아를 형상화 한 것. 1976년 영화 개봉 이후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록키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록키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주인공이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희망적인 미국의 이미지를 한 개인인 록키라는 캐릭터 속에 집약한 영화란 평가도 나온다. 영화에서 필라델피아 빈민가 출신의 무명 복서인 록키는 세계 챔피언인 아폴로와의 시합에선 졌지만 15회전까지 버텨내며 승리나 다름없는 결과를 얻어냈다.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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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록키에 더욱 열광하는 건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실베스터 스탤론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해서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스탤론은 가난한 무명 배우에서 록키의 대성공으로 단숨에 헐리우드 톱스타 자리에 오르며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록키라는 가상의 인물이면서 스탤론이라는 실존 인물이 투영된 이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현재 미국의 상황을 떠올리면 록키라는 인물의 식지 않는 인기는 많은 생각을 낳게 한다. 록키는 가난한 백인 서민층이자 이민자다. 미국 사회 비주류다. 영화가 개봉한 1970년대에 록키는 미국인들에게 계층 상승을 의미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희망을 줬다. 하지만 2020년대인 지금은 여전한 인기에도 록키가 성취한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은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록키와 같은 서민층, 특히 몰락한 중산층인 백인들의 좌절감은 매우 크다.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로 인한 일자리 감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극화 등으로 중산층 상당수가 붕괴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배경에도 이들 계층에 속하는 성난 백인들, 이른바 '앵그리 화이트'가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제조업 복원과 일자리 만들기에 올인하는 목적도 중산층 복원이다.

이민자의 삶 역시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민의 나라'인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불법이민 증가로 미국 내 반(反)이민 정서가 확산되면서 록키와 같은 이민자 출신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기 때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을 세웠고, 오는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면 불법이민자를 강제추방하겠다고 공약했다. 그간 유화적인 이민 기조를 취해 왔던 바이든 대통령도 이민정책에서 '우클릭'하고 있다.

록키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 온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많은 울림을 남겼다. 영화가 개봉한 1970년대만 해도 어느 정도 통하는 얘기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끊어진 계층 사다리, 사라진 관용으로 아메리칸 드림은 퇴색된 지 오래다. 50년 가까이 된 영화인 록키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에 그만큼 더 살기 팍팍해진 현실이 그려져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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