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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②빠른 진압에만 급급, 매뉴얼도 없이 투입…“만능 소방관 바라는 문화 안 돼”[영웅들은 왜 돌아오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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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 4월29일 오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의 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현장에 구급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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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경기 포천의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불이 났다. 진압대원들이 계속 물을 뿌렸지만 불길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화재진압에 인력이 더 필요해지자 현장에 출동했던 구급대원 윤모 소방관(당시 34세)도 소방호스를 들었다.

불길이 잡힐 무렵 그는 공장 안까지 진입해 인명검색을 했다. 그 순간 콘크리트가 무너지며 윤 소방관을 덮쳤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순직했다. 구급대원이 화재 진압에 투입됐다가 목숨을 잃은 첫 사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3년 12월 제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19구급대원인 임성철 소방교가 감귤 창고 화재 현장에서 소방호스를 잡고 직접 불을 끄다 무너진 콘크리트 처마에 깔려 숨졌다.

환자 이송 업무 등을 수행하는 구급대원이 직접 불을 끄는 상황은 일선 소방관들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소방청의 ‘제주 순직사고 보고서’를 보면 전국 19곳의 소방본부(경기·경남은 2곳) 중 15곳이 구급대원에게 ‘진압대원’ 임무를 부여한다.

구급대원이 본연의 업무만 수행하는 지역은 서울·광주·대전·세종 등 4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시도에서는 구급대원이 화재 진압 활동을 지원한다. 이 중에서도 인천과 울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에서는 구급대원이 지원을 넘어 직접 소방호스를 잡고 불을 끈다.

‘불 끄는 구급대원’을 운영하는 지역은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려고 펌프차에 구급대원들을 탑승시키기도 한다. 구급대원들은 초기 상황전파, 소방용수 확보, 소방호스 전개 및 정리, 화재 진압 등의 임무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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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은 역할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뉜다. 불을 끄는 진압대원, 현장에서 인명을 수색하고 구조하는 구조대원, 환자를 이송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구급대원이다.

구급대원이 되려면 간호사·응급구조사 자격증 등을 취득해야 한다. 화재 진압 전문성이 진압대원이나 구조대원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북의 한 119안전센터에서 ‘불 끄는 구급대원’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A소방위(47)는 “구급과 화재 진압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면서 “화재 진압에 나서는 구급대원은 돌발 상황 등에 대한 대처가 떨어져 사고 확률이 굉장히 높다”라고 말했다.

구급대원이 화재 진압에 투입될 때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표준절차나 지침도 없었다. 소방청은 제주 순직사고 이후에서야 ‘화재현장 구급대원 역할 권고안’을 만들었다. 전국 시·도 소방본부에는 지역 특성에 맞는 지침을 마련해 시행토록 했다.

하지만 권고안은 오히려 ‘불 끄는 구급대원’을 운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줬다. 구급대원은 원칙적으로 병원 이송 등의 업무를 담당토록 했지만 개인 보호장비를 완벽히 착용하고 지휘관의 활동 명령이 있으면 화재 진압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A소방위는 “인력이 부족하면 다른 소방대 지원을 받으면 되는데 ‘빠른 진압’만을 강조하는 탓에 구급대원들도 화재 진압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문화가 조성됐다”면서 “뭐든 다 할 수 있는 만능 소방관을 바라는 문화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김태희 기자 kth0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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