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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15년 전 집단성폭행 유서로 자백…대법 “증거능력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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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피해자 실명 기재하고 극단선택

1심은 무죄…유서 증거능력 없어

2심은 유죄…징역 2년 6개월 실형

대법, “유서 증거능력 없다…인간 기억력에 한계”

헤럴드경제

대법원[헤럴드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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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한 남성이 “15년 전 친구들과 같은 반 여학생에게 술을 먹이고 집단 성폭행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했다. 피해자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혐의를 부인했다. 이 유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유죄를 선고할 수 있을까.

대법원은 “그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앞서 진행된 2심에선 유죄가 선고됐지만 대법원은 유서가 사건 발생일부터 약 15년 지난 뒤 작성된 점 등을 근거로 증거능력을 인정해선 안 된다고 봤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이흥구)는 성폭력처벌법상 특수준강간 등 혐의를 받은 남성 3명에 대한 사건에서 이같이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들에게 각각 징역 2년 6개월 실형을 선고한 원심(2심) 판결을 깨고, “다시 판단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남성 A씨가 2021년 3월, 서울 소재 한 아파트에서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한 것에서 시작했다. 유서엔 15년 전, A씨가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같은 반 여학생을 불러내 술을 먹인 뒤 초등학교 벤치에서 성폭행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유서엔 사건이 발생한 대략적인 시점과 장소, 경위와 함께 친구 세 명, 피해자의 실명도 적혀있었다. A씨는 유서에서 “이제 와서 이렇게 글로 남기는 이유는 저 자신이 용서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너무 죄송하다. 이 사건이 꼭 해결되기를”이라고 적었다. 경찰은 이 유서를 계기로 수사를 시작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과 피해자, 피해자 모친의 진술 등을 종합했을 때 이들이 이 무렵 A씨와 함께 초등학교 등에서 술을 마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술에 많이 취했었다”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피해자도 성폭행 여부에 대해 확신은 없었다.

피해자는 수사기관에서 “당시 술을 마신 다음 날 속옷에 피가 묻어 있어서 산부인과 진료를 보긴 했다”며 “선생님이 혹시 모르면 사후피임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하셔서 먹었던 것 같다”고 진술했다. 다만 “그때 당시에도 약간 이상하긴 했는데 전혀 기억이 없어서 (성폭행 여부에 대해) 확신은 없었다”고 말했다.

조사 결과, 수사기관은 가해자로 지목된 친구 세 명을 성폭력처벌법상 특수준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재판에서 쟁점은 해당 유서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였다. 망인이 된 A씨가 법정에서 유서에 대해 진술할 수 없게 된 이상 유서를 증거로 사용하려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의 증거라는 게 인정돼야 했다.

1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을 맡은 서울남부지방법원 12형사부(부장 유진현)는 2022년 7월, 유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같이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망인이 된 A씨가 당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다른 이들에 비해 A씨만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점 ▷A씨가 생전 친구에게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것은 고백했으면서도 성폭행 사건은 언급하지 않은 건 납득하기 어려운 점 등을 근거로 이같이 판단했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9형사부(부장 전지원)는 지난해 9월, 세 명 각각에게 징역 2년 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우울증을 앓긴 했어도 망상 증상은 없었고 ▷친구들을 무고할 동기가 없으며 ▷유서 내용에 모순이 없고 ▷당시 피해자도 산부인과를 방문해 성관계 가능성을 걱정했던 점 ▷피고인들이 범행을 숨기기 위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판단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대법원은 해당 유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원심(2심) 판단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해당 유서가 사건 발생일부터 무려 14년 이상 지난 뒤 작성됐다”며 “사람의 기억력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A씨의 기억이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전제했다.

이어 “유서가 A4 용지 1장 분량인 이상 그 표현이나 구체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유서 내용이 객관적 증거·진술증거로 뒷받침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유서에 구체적인 행위 내용에 관한 세세한 묘사가 없고 ‘유사성행위', ‘성관계’라고 추상적으로 기재돼 있을 뿐 피고인들이 어떤 행동을 분담했는지 내용도 없다”며 유죄 판결을 깼다.

이로써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는 대신 4번째 재판을 받게 됐다. 핵심 증거에 대해 대법원이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이상 향후 진행될 재판에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죄가 나오기 어렵게 됐다.

notstr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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