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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며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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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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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잘하셨어요, 이번에는 왼쪽!



하나, 둘, 셋, 무릎을 더 펴야 돼요, 옳지! 다섯, 여섯.



어머니가 낙상으로 발목 골절을 당하셨다. 재활을 돕고자 부모님 댁에 머문 지 한달이 되었다. 노쇠해 가는 부모를 곁에서 모시지 못하니 안타깝고 죄스럽지만, 제주의 오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푸르기만 하다. 아침저녁으로 휠체어를 밀고 나가 아파트 단지를 돌며 근육 강화 운동을 시켜드리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공기는 청량하고, 햇살은 따사롭다. 목이 마르면 단지에서 가꾸는 금귤 열매를 따 먹고, 더우면 그늘에서 땀을 들이며 어머니가 심으셨다는 둥굴레며 새우난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본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그 시간이 참 좋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선 휠체어를 밀려면 만만치 않게 힘이 든다. 아버지는 젊어서 운동을 하셨고, 지금도 근력이 좋으신 편이지만 휠체어를 밀면서 여기저기 통증이 생겨 몇번 병원을 찾아야 했다. 내가 밀어봐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완만한 오르막이라도 제법 힘을 써야 했다. 더 크고 힘이 덜 드는 모델이나 전동 휠체어도 있지만, 그것들은 차에 싣고 내리기가 곤란하다.



보도에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다. 이제 보도에는 경사로를 설치한 곳이 많다. 하지만 더 세심하게 관리하면 좋겠다. 단지 내 경사로 앞에는 떡하니 주차 공간을 두었다. 누군가 거기에 차를 세우면 경사로 자체가 아무 쓸모 없다. 보도 끝에 경사로가 없어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일도 잦다. 단지를 벗어나 보자.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턱을 최소화해야 한다. 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휠체어 앞바퀴가 걸려 올라가기 어렵다. 가까스로 올라서서 몇 발짝 떼는데 어이쿠! 보도블록이 솟아 있거나 구조물 주변이 푹 꺼져 있는 곳에 바퀴가 걸린다.



건물은 더 문제다. 경사로가 아예 없는 곳도 많다. 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맛집을 찾았다가 들어가는 데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나올 때는 턱을 내려와야 해 더 힘들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한 걸음이지만,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동행자에게는 힘겹고 위험한 모험이다. 쉬엄쉬엄 집 주변만 다니는데도 진이 빠진다. 제주 사는 80대 노인이 이 정도라면, 사람도 훨씬 많고 복잡한 서울에서 이곳저곳을 다녀야 하는 젊은 장애인의 사정이 어떨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장애이동권이라고 하면 대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를 떠올린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의 교통수단을 볼모로 잡는다는 비난이 우세한 형편이다. 비장애인이 다수이므로 소수인 장애인이 양보해야 한단다. 하지만 필요한 곳,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결국 장애인은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타인의 선의에 의존하는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사회를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훨씬 ‘덜 과격한’ 방식으로 장애이동권 증진에 노력하는 단체도 있다. “장애가 무의미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2015년 결성된 협동조합 ‘무의’다. 휠체어를 타는 딸이 조금이라도 편하고 안전하게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바랐던 한 엄마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무의의 가장 큰 성과는 비장애 시민들과 함께 서울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 지도를 만든 것이다. 건강한 사람도 지하철 환승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잠시 길을 잃을 때마다 나는 휠체어를 밀고 그 길을 다니며 장애이동권을 가로막는 요소를 하나하나 찾아냈을 엄마의 간절한 집념과 동료 시민들의 연대를 생각한다. 무의 역시 만성적인 인력과 자금난에 시달린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운이 좋아 그런 일을 피했어도 누구나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소수가 다수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소수도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 그런 덕업을 쌓으면 반드시 현세에 보상받는다. 고령화 시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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