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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단독] “월 4만원에 해외여행 가능”… 적립식 여행사 먹튀에 800명 뒤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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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 대표, 파산 선고 후 연락 두절
회사 빚 24억, 자산은 겨우 8만 원
최근 적립식 여행사 먹튀 피해 속출
한국일보

지난달 파산한 A컨설팅 업체의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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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가려고 매달 차곡차곡 모았던 돈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돈도 사람도 다 잃게 생겼어요."

"월 몇만 원씩만 적립하면 나중에 해외여행을 보내준다"고 유혹해, 매달 고객의 쌈짓돈을 쓸어 담던 여행사가 돌연 파산을 선언했다. 가족·친구와 함께 하는 행복한 여행을 꿈꾸며, 수년간 적금처럼 돈을 붓던 소시민들은 하루아침에 돈 날릴 위기에 처했다. 이런 적립식 여행사들이 활개 치면서 피해가 잇따르는 가운데, 소비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5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회생법원은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소재 여행컨설팅 업체 A사에 파산을 선고했다. A사 대표 김모씨는 2월 파산을 신청했는데, 신청일 기준 회사 자산은 단 8만 원에 불과한 반면 부채는 24억 원 이상이었다. 채권자로 이름 올린 이들만 876명으로 전체 피해규모는 수십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 이야기를 종합하면, 김 대표는 매달 수만 원만 내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으로 해외여행을 보내준다는 '적립식 여행'을 내세워 전국에 지점을 두고 고객들을 유치했다. 그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행사와 멤버십 회원을 모집하는 컨설팅 업체를 별개로 운영하면서, 고객들에게 멤버십에 가입해 돈을 내면 여행사 상품을 이용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피해자들 중에는 6년 넘게 매달 돈을 부어 수천만 원의 피해를 본 이도 있었다. B씨는 "2017년 아내와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사를 찾았다가 매달 4만 원만 내면 여행 가고 싶을 때 원하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에 가입했다"며 "여행을 못 해도 100% 돈을 돌려받을 수 있고, 보증보험에 가입도 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B씨는 함께 여행할 친구와 친인척까지 설득해 가입시키는 바람에, 지인들이 낸 3,000만 원까지 한 푼도 못 받을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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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립식 여행사의 멤버십여행 팸플릿. 피해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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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피해자 C씨는 "지난해 5월부터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돈도 돌려주지 않았다"며 "코로나로 회사가 어렵다, 순서가 있으니 좀만 기다려달라면서, 여행 가려는 사람들한테는 여행자가 아닌 제3자 카드를 쓰게 돼 문제가 생겼다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표 등 업체 관계자들은 "회사가 파산했다"는 내용을 문자 메시지로 알린 뒤 현재는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김 대표가) 자금 투입 여력이 안 돼 폐업하게 됐다는 문자를 보낸 뒤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본보 기자가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종로구의 업체 사무실에 가보니, 문이 굳게 닫혀 있을 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입구엔 은행에서 날아온 내용증명과 법원 등기가 왔다는 우편물 확인서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파산 선고를 받은 컨설팅업체와 달리 여행사 홈페이지는 정상 운영되고 있지만, 김 대표와 업체 등은 피해자들의 연락을 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이 믿었던 영업보증보험에도 문제가 있었다. 홈페이지에 기재된 금액이 전체 빚의 10% 정도인 2억8,500만 원에 불과했다. 피해자들은 전체 피해 상황 등을 종합하는 대로 경찰에 김 대표를 고소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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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찾은 서울 종로구의 여행사 사무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서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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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립식 여행사의 파산으로 인한 피해는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서울 용산구의 다른 여행업체 대표 역시 같은 방식을 썼다. 피해자 모임 단체방에 들어 있는 이들만 1,300여 명이고, 피해 게시글만 수십 건이다. 피해자들은 2월 경찰에 이 회사 전 대표 박모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고, 현재 대표 주소지 관할인 전북 전주 완산경찰서에서 수사 중이다. 지난해 대전에 있는 적립식 여행사도 파산해 피해자 1,280여 명이 25억 원 넘는 피해를 봤다.

이런 적립식 여행사 파산의 경우, 소송을 통해 돈을 돌려받기도 쉽지 않다. 경찰에 박 대표를 고소한 D씨는 "여행사가 극소수한테는 환불을 해주면서 '순차적으로 환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며 "단체 소송을 진행하더라도 개인당 피해 금액이 적고, 개인별로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계약 시 환불 규정을 잘 살펴보고 피해를 알자마자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법무법인 대진의 김민성 변호사는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형사 고소를 통해 배상 판결을 받아야 한다"며 "사기를 지속하는 경우가 많으니 일단 은행의 자동이체를 해지하고, 경찰에 신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현정 기자 hyun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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