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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광화문에서/강경석]저출산 재탕 공약 대신 이미 낸 법안이나 처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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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강경석 사회부 차장


“한쪽에서 신공항 만들겠다고 하면, 다른 쪽에서 해저터널 뚫겠다고 하는 게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재원 계산해 가면서 따지고 있다간 타이밍만 놓칠 뿐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 국면에서 여야가 경쟁적으로 내놨던 부산 가덕도 신공항 건설 공약과 가덕도와 일본 규슈 간 한일 해저터널 건설 공약에 대해 최근 이렇게 말했다. 가덕도 신공항은 2029년 개항을 목표로 건립이 진행 중이지만 한일 해저터널은 아마 저런 공약을 내걸었는지 기억조차 못 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에게 한일 해저터널 진척 상황에 대해 묻자 “아직 구체화된 건 없다”는 하나 마나 한 답만 돌아왔다. 한일 해저터널 공약은 결국 조용히 사그라질 게 뻔하다.

3년이나 지난 공약을 기억에서 소환할 것도 없다. 불과 한 달여 전 4·10총선에 출마한 후보자들과 정당들은 피 토하는 심정으로 열변을 토하며 각종 공약을 내걸었다. 특히 여야는 인구소멸 위기를 돌파하겠다며 올해 1월 같은 날 저출산 공약을 발표했다. 유급 ‘아빠 휴가’를 의무화하거나, 신혼부부에게 1억 원을 대출해 주고 셋째까지 낳으면 전액 탕감하겠다는 장밋빛 공약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여야 모두 내놨던 공약 중엔 당사자 신청만으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이 자동으로 시작될 수 있게 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 내용은 이미 지난해 2월 21대 국회에서 남녀 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으로 올라왔다. 근로자가 육아휴직을 신청했는데 사업주가 14일 이내에 명확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이를 허용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정하는 법률 개정안이다.

이 법안은 어떻게 됐을까. 지난해 4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오전 10시 36분부터 오후 5시 45분까지 국회의원 14명과 고용노동부 장차관과 실국장 18명이 참석한 상임위에서 단 한 글자도 상의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 오찬을 위해 정회한 2시간 25분을 제외하더라도 온종일 단 한마디 언급조차 되지 않은 법안을 총선 공약으로 들고나온 건 사실상 기만에 가깝다.

다른 법안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모자보건법에 따라 난임부부를 지원하는 대신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별도로 난임 치료를 지원하는 법률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 법안은 2021년 4월 상임위에 상정된 이후 제대로 된 논의 한 번 못 하고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사라질 운명을 앞두고 있다.

국민이 더 이상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를 멀리서 찾을 게 아니다. 말로는 민생을 외치고, 선거철에는 그럴듯한 공약을 내놓지만 정작 일해야 할 때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대계가 걸려 있는 저출산 문제마저 이미 발의된 법안조차 처리하지 않은 채 선거를 앞두고 공약이랍시고 재탕하는 국회에 과연 국민이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최근 한 시민단체는 21대 국회에서 저출산 대책 관련 법안 220개 중 단 7개만 처리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럴 거면 저출산을 해결하겠다고 이런저런 약속만 할 게 아니라 이미 발의된 법안이나 제대로 논의하고 처리하는 게 더 생산적이다.

강경석 사회부 차장 cool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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