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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이슈 미술의 세계

40년 전 백남준의 위성쇼를 새롭게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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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백남준이 1976년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 과달카날섬 현장을 찾아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상물 ‘과달카날 레퀴엠’의 한 장면. 그의 작업 동료로 과달카날 작업에 동행했던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이 섬의 과거 전투 현장에서 열대수 나뭇가지로 첼로를 켜는 진혼 퍼포먼스를 벌이는 모습이다. 백남준아트센터 1층 들머리에서 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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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과달카날 섬은 1943년 태평양전쟁의 승부처였다. 일본군에 밀리던 미국은 섬의 밀림과 바다에서 혈전을 치른 끝에 첫 완승을 거두며 대반격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 섬은 현대미술사의 전적지로도 기억된다. 1976년 백남준(1932~2006)은 전란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을 녹인 비디오아트 명작 ‘과달카날 레퀴엠’을 이곳에서 찍었다. 예술 짝패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훗날 거장반열에 오른 촬영조수 빌 비올라와 동행한 백남준은 공방전이 벌어졌던 해변과 풀숲을 헤매며 샬럿과 연주 퍼포먼스를 벌였다. 부서진 바이올린을 질질 끌면서 해변을 산책하다 군복 차림으로 첼로를 등에 지고 포복하는 샬럿과 마주치는 장면도 찍었다. 샬럿은 주검을 담는 가방에 몸을 숨긴 채 연주 퍼포먼스를 벌이고, 옛 전장에 서거나 해변에 누워 열대 나뭇가지로 첼로를 켜는 진혼 몸짓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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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1층 안쪽에서 여러개의 비디오패널로 나누어져 관객들을 맞고 있는 백남준의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의 여러 영상들. 스페인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가 등장하는 영상을 배경으로 안무가 머스 커닝햄이 춤을 추고 백남준의 예술 동료인 샬럿 무어만이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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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가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 ‘과달카날 레퀴엠’을 감상할 수 있는 마당을 펼쳐놓았다. 1984년 신년 벽두에 전세계에 방영된 백남준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의 방영 40돌을 기리는 두 전시회의 한 축으로 지난달 시작한 첫번째 특별전 ‘일어나 2024년이야!’(내년 2월23일까지)의 1층 전시장이다. 들머리에 걸린 스크린에 상영되는 ‘과달카날 레퀴엠’은 구성부터 흥미롭다. 백남준과 샬럿의 전장 퍼포먼스 장면 사이로 1940년대 치열한 전투 장면, 생존장병과 원주민의 증언, 뒤틀리고 울렁거리는 이미지들이 끼어들곤 한다. 기괴하고 스산하면서도 웃기고 낙천적인 영상과 음향의 조합들…. 불안과 호기심, 공포와 재미가 뒤섞인 약 1시간짜리 영상물을 감상하다 보면 평생 전쟁을 의식했던 백남준이 평화를 그리며 피워낸 상상과 생각들을 감촉하게 된다. 전란의 상흔을 치유하는 예술의 힘과 수행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전해주는 수작이다.



‘일어나 2024년이야!’ 전은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좇았던 이상을 그때 그 영상과 오늘날의 영상을 함께 펼쳐놓으며 조명한다. 1984년 미국, 프랑스, 한국, 일본, 독일 등에 위성으로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뉴욕 생방송을 중심으로 전체 방영분을 압축한 8개의 영상 패널을 통해 당시 슈퍼예술가들의 무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스페인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가 등장하는 영상을 배경으로 안무가 머스 커닝햄이 춤을 추고 샬럿이 첼로를 연주하며 프랑스 배우 이브 몽탕이 춤추며 파리의 일상을 노래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런 영상을 살펴보면서 첨단 기술을 통해 세계 곳곳에 예술을 잇고 평화의 가치를 퍼뜨린다는 작가의 생각을 반추할 수 있다. 이어서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독일관 황금사자상 수상작 중 일부인 ‘칭기즈칸의 복권’ 조형물과 1988년 제작한 위성 3부작 마지막 작품인 ‘손에 손잡고’에서 조용필 밴드의 공연이 펼쳐지는 영상을 보게 된다. 1층 안쪽 공간에서는 류성실 작가와 얼터너티브 케이(K)팝 그룹 바밍타이거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유튜브 환경에 맞게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으로 각색해 공연 무대로 표현한 ‘사랑해요 아트라이브’가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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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2층 전시장에 나온 홍민키 작가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라이브 방송 중 해킹 당한 비비(BB)?!??’(2024). 40년 전인 1984년 방영된 백남준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의 생방송 무대를 연결했던 두 사회자 역할에 착안해 현재 온라인 방송 플랫폼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BB(버타리)’란 가상의 유튜버를 등장시켰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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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빅브라더 블록체인’(내년 8월18일까지)은 급변하는 디지털 사이버 환경의 변화를 주시한다. 백남준의 후예인 미디어예술가들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국내외 작가 9명의 작품으로 보여준다.



2층에 올라오면 단박에 눈에 띄는 작품이 홍민키 작가의 싱글채널 비디오 영상 ‘라이브 방송 중 해킹당한 비비(BB)?!??’(2024)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의 생방송 무대를 연결했던 두 사회자 구실에 착안해 현재 온라인 방송 플랫폼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BB(버타리)’란 가상의 유튜버를 등장시킨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40년 전에 견줘 격변한 매체환경을 화면에 캡처된 작은 동영상 ‘짤’로 뜨는,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주요 장면과 대비시키면서 유튜버가 일종의 21세기판 ‘빅브라더’로 군림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통로 중간에 놓인 권희수 작가의 설치영상물 ‘나선필름’(2024)은 360도 돌아가는 비디오카메라가 관객과 전시장의 풍경 이미지들을 촬영한 뒤 셔터스피드 장치를 통해 알록달록한 다색 빛으로 투사시킨 작품이다. 1970년대 백남준이 구현한 비디오 신시사이저의 다색 영상 작업과 비슷한 이미지를 빚어낸다는 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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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만날 수 있는 권희수 작가의 설치영상물 ‘나선필름’(2024). 360도 돌아가는 비디오카메라가 촬영한 관객과 전시장의 풍경 이미지들을 영상의 빛을 분해하는 셔터스피드 장치를 통해 알록달록한 다색 빛으로 투사시킨 독특한 작품이다. 1970년대 백남준이 구현했던 비디오신시사이저의 다색 영상 작업과 비슷한 이미지를 빚어낸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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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엔 홍콩 작가 삼손 영의 사운드설치작품 ‘제단 음악’(2022)이 있다. ‘우유부단한 신자를 위한 예배’란 부제를 붙인 이 작품은 인공지능(AI)이 홍콩매체의 뉴스를 짜깁기해 가짜 뉴스를 만들고 이를 음향으로 만들어 제단 같은 공간에 배치한 여러 스피커에서 성가처럼 울려 나오게 하는 얼개를 지녔다. 기계에 신앙과 감정까지 의존하는 현대인들의 무력증을 풍자하는 의도로도 읽힌다. 2015년작이긴 하지만, 독일 미디어아트 대가 히토 슈타이얼이 만든 영상설치물 ‘태양의 공장’도 볼수록 빠져들게 되는 문제작이다. 테크노 뮤직에 맞춰 흥겹게 춤추지만, 실제로는 게임을 만들기 위한 재료 데이터로 춤동작 에너지를 대주는 인간군상의 디스토피아적 노동을 뮤직비디오 풍 화면에 담아냈다. 기술과 미디어의 미래를 성찰한 백남준의 작업적 맥락을 대중문화와 결합한 첨단 영상언어로 변주하고 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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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작가 삼손 영의 사운드설치작품 ‘제단 음악’(2022). ‘우유부단한 신자를 위한 예배’란 부제를 덧붙인 이 설치작품은 인공 지능이 언론매체 ‘홍콩 프리 프레스’의 뉴스를 바탕으로 가짜 뉴스텍스트를 계속 만들고 이를 음향으로 만들어 제단 같은 공간에 배치한 여러 스피커에서 성가처럼 울려 나오게 하는 얼개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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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액을 들여 스펙터클한 작품들을 끌어모은 중량급 전시는 아니지만, 첨단기술과 문화예술의 만남이란 백남준 작업세계의 숨은 단면들과 그 현재진행형 양상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는 점을 평가할 만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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