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5 (화)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치안 안전망에서 배제된 여성, 끝까지 찾아낼 것”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이은애 총경이 25일 경기 의정부시 금오동 경기도북부경찰청 청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장님, 저희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아니에요. 그냥 제가 심심해서 보는 거에요.”



2021년 경기도 양평경찰서장 시절 이은애 총경은 틈만 나면 사무실 자리에 앉아 엑셀 파일을 들여다봤다. 양평서가 2020년 5월부터 1년간 접수한 112신고 2만850건이 담긴 파일이었다. 불법 주정차 민원부터 가정폭력 피해까지 112신고 사건이 날짜별로 나열된 자료였다. 이 총경은 신고자가 여성일 때와 남성일 때, 신고 내용과 후속 조처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성별’로 재분류된 데이터는 또렷한 경향을 드러냈다. 여성은 남성보다 살인·강간·절도 등 주요 범죄 피해 신고를 많이 했다. 그런데 남성보다 여성이 신고한 사건의 현장 종결 비율이 높았다. 반면, 다른 부서로 연계돼 수사가 이어지는 비율은 남성 신고에 견줘 낮았다. 가정폭력, 데이트폭력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거나 경찰이 화해를 유도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12 치안 서비스의 성인지적 분석’ 보고서에서 이 총경은 이렇게 썼다. ‘치안 서비스가 평등하게 제공되는지 파악하려면 성별 분리 통계가 필요하다.’



이런 연구가 나온 지 반년이 지나지 않아 경찰은 해마다 112신고자의 성별을 구분한 ‘주요 젠더폭력범죄 신고자 성별 분류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변화를 이끌어낸 이은애 총경(경기도북부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을 지난 25일 경기도북부경찰청 청사에서 만났다.



“데이터는 치안 자원을 어디에 얼마큼 투입할지 결정하는 근거잖아요. 데이터에 왜곡이 있진 않은지 살펴보고 싶었어요.” 이 총경은 경찰대학교를 졸업하고 1997년부터 파출소·지구대 근무, 일선서 여성청소년과장, 경찰청 감사관실 피해자보호계장 등을 거쳤다. 치안 최일선부터 정책을 점검하는 자리까지 두루 경험한 셈이다. “지구대에 있으면 가정폭력, 성폭력 신고가 정말 많아요. 사건별로 대응하다 어느 순간 ‘뭔가 비어 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확 드는 거예요. 대응 수준을 높이려면 다른 접근이 필요했어요.”



그러면서 이 총경은 영국 사례를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젠더범죄를 성폭력, 가정폭력 등으로 세분화해 처벌 절차에 관한 특례법을 각각 제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이런 법 체계가 포섭하지 못하는 젠더범죄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텀블러 체액테러’ 같은 사건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젠더폭력 성향을 띠지만 형법상 재물손괴죄 이외에 마땅히 처벌할 근거법이 없다. 이 총경은 “영국은 범죄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의 범행 동기가 특정 성별·인종 등에 대한 혐오(증오)범죄일 경우 이를 따로 기록한다”며 “성평등 치안이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젠더폭력’이라고 구분해 별도로 다루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범죄 대응에 젠더 관점이 녹아있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평등 치안 서비스를 고민하는 여정엔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여성 동지”들도 함께였다. 경찰 조직 내 성평등과 성평등 치안 서비스에 대해 공부하는 모임 ‘경찰젠더연구회’ 회원들이다.



한겨레

경찰 인재개발원과 경찰젠더연구회가 지난해 ‘성인지 역량, 편견을 깨뜨리는 힘’이라는 주제로 연 학술세미나에서 이은애 총경이 발언하고 있다. 이은애 총경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가 경찰에 첫발을 내디딘 1990년대 후반 전체 경찰 중 여성은 1%도 되지 않았다. 성차별적 시선이 교차하는 일터에서 고립감을 느끼며 20년 가까이를 버티던 2017년 겨울, 같은 어려움을 마주한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경찰젠더연구회의 시작이다.



“처음엔 조직 안에서 내가 겪은 성차별, 성폭력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다 젠더폭력, 성평등 치안에 대해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연구회는 2020년 여경 혐오, 2021년 성평등 치안 서비스, 2023년 성인지 역량(성별에 따른 불평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경찰청 교통국 소속 회원은 지난해 세미나에서 2017~2022년 교통사고 데이터를 분석해 운전이 미숙한 여성 운전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근거 없는 편견임을 지적했다. 위험 운전 행동이나 운전 능력 부족과 연관 있는 교통사고는 남성 운전자가 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또다른 회원은 낯선 남성이 집에 침입하는 범죄에 대해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커 ‘성적 목적 주거침입죄’를 신설하는 법 개정안 발의에 물꼬를 텄다.



연구회는 2019년 ‘대림동 경찰관 폭행 사건’이 여경 비하로 번지자 “공권력 경시 풍조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하는 사안이 여성 경찰에 대한 혐오로 오용돼서는 안 된다”며 목소리를 냈다. 이어 2022년엔 여성 경찰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현실을 담은 책 ‘여성, 경찰하는 마음’을 회원들이 함께 써서 출간하고, 여기서 얻은 인세 수입을 비영리단체 ‘십대여성인권센터’에 기부했다. 10명으로 시작한 회원도 76명까지 늘었다.



여성 경찰이 각자 자리에서 보다 성평등한 치안 서비스를 고민하는 동안 경찰 조직도 성평등을 향해 한발짝 나아갔다. 경찰은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인을 별도로 분류하지 않는데, 2023년 초부터 살인을 저지른 남성 가운데 배우자·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여성을 살해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갈길은 멀다 “가정폭력 사건인데 피해자 외도 정황이 70%, 가해자 폭행사실은 30%만 담은 수사 기록을 볼 때가 있어요. 유독 성인지 역량이 떨어져서 이렇게 쓴 건 아닐 거에요. 자연스럽게 (피해자가 폭력을 유발했단) 동조가 생겼겠죠. 성평등은 ‘공기’ 같은 거잖아요.”



공기는 고이지 않는다. 반드시 새어나와 다른 곳으로 흐른다. 경찰 내 성평등은 다시 성평등 치안서비스로 사회 곳곳에 흘러갈 것이다. 이 총경이 성평등 조직 문화 만들기에 여전히 뜨거운 이유다



“여성 경찰 비율이 14%를 넘어갔다고 하면 많아 보이는데, 여성청소년과를 제외하면 아직도 여성이 1명뿐인 부서가 대다수에요. 일하는 환경에서는 섬처럼 혼자 인거죠. 조직 내 성평등을 상의할 사람이 없는 거에요. (…) 경찰 조직이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해요. 경정 이상 간부급 여성 중에 여성청소년과장 안 해본 사람 없을 거에요. 간부급 여성에게 마음 편하게 시킬 보직이 여청과장 밖에 없는 거에요. 여청과에 여성을 모아놓는 방식은 ‘핑크 게토’(Pink Ghetoo·직장 여성의 업무가 보이지 않게 한정되는 현상)가 될 여지도 있어 우려스러워요.”



이 총경에게 앞으로 목표를 물었다. “여경 후배들에게 더 나은 직업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냥 존재만으로 의지가 되는 선배가 되는 게 꿈이에요. 더불어, ‘어떤’ 여성이 ‘어떻게’ 치안 안전망에서 배제되는지도 끝까지 찾아내고 싶습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성별 분석 필요성을 깨닫게 한 ‘보이지 않는 여자들’



이은애 총경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늘 책과 맞닿아 있다. 고교 시절 ‘성평등의 사회학’(1993)을 읽고 여성이 처한 차별적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객관성을 가장한 남성 중심적 사회학 이론을 성평등 관점에서 다시 써내려간 책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정말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건가 싶었어요.” 경찰이 되고 목도한 현실은 더 참담했다.



고소·고발인으로 바글바글한 일선 경찰서 조사실에서 성범죄 피해자들은 “어떻게 피해를 당했는지”를 목청 높여 진술해야했다. 포주에게 선불금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업주로부터 고소당한 성매매 피해여성을 조사하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성매매특별법(2004년 제정)이 없어서, 성매매 여성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었어요. 그런데 ‘현타’가 오는 거에요. 내가 여기서 이렇게 피해자와 업주를 만나게 하는 게 맞나….”



고뇌는 공부로 이어졌다. 유학을 떠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여성학 관점에서 범죄학을 공부했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2020)은 112신고 통계를 성별로 분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책이다. 남성을 ‘기본값’으로 설정한 채 이뤄지는 의사 결정이 젠더 데이터 공백을 야기하며, 이는 여성에게 각종 불이익과 위협을 초래한다는 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줘 전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총경은 “112신고 시스템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됐는데, 그렇다면 이 시스템의 최종 수혜자는 누구인가. 젠더 관점에서 이 시스템은 제대로 설계된 것이 맞나 같은 의문을 연구를 통해 해소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겨레의 벗이 되어주세요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