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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조국혁신당 뜨는 7가지 이유 [3월26일 뉴스뷰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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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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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사회, 국제 분야를 두루 취재하고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권태호 논설실장이 6개 종합일간지의 주요 기사를 비교하며, 오늘의 뉴스와 뷰스(관점·views)를 전합니다. 월~금요일 평일 아침 8시30분, 한겨레 홈페이지(www.hani.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3.26) 아침 가장 큰 뉴스는 역시 △의대 교수 집단사직 강행(6곳)입니다. 정부가 전공의에 대해 “유연한 처리”를 강조했지만, 핵심인 ‘2천명 증원’ 입장 철회를 요구하며, 의대 교수들은 예정대로 사직서 제출에 나서는 등 강경 입장을 누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이외에 △총선 기획(4곳) △미-일, 주일미군-자위대 일체화 가속(2곳) △북, “일본에서 회담 제의” 밝혀(2곳) 등이 신문 1면을 차지했습니다.



① 차이의 발견 : 조국 현상



② 시선, 클릭!



- 개인사업자 대출연체율, 법인 파산 늘어
- 각종 사회변화상 지표, 바뀌는 트렌드
- 사람 뇌에 칩 심는 세상, 언제쯤 올까



- 서울 봄꽃 명소



③ Now and Then : 봄비(박인수, 1970)







① 차이의 발견





# 조국



1. 인터뷰



- 한겨레, 경향, 한국일보가 나란히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인터뷰를 오늘치 신문에 내보냈습니다. 인터뷰는 모두 어제 진행됐습니다.



경향 = “한동훈 잡는 조국? 선봉에서 윤 정권과 싸우겠다”(1면)
한국 = “의원 배지 한 번 달려고 나왔겠나...7共 완성 때까지 정치 계속”(5면)
한겨레 = “최악상황 와도 제2, 제3 조국 있어...민주당과 합당 안한다”(6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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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국 돌풍’ 어느 정도인가?



* 일부 조사에서는 ‘비례대표 정당 투표 의향’이 30%를 넘는 곳도 있습니다만, 공신력이 가장 높은 한국갤럽 조사를 통해 보겠습니다.



1) 비례대표 정당 투표 의향(19~21일 조사)



- 국민의미래 30, 더불어민주연합 23, 조국혁신당 22, 개혁신당 5, 새로운미래 2, 자유통일당 2, 녹색정의당 1, 부동층 15



- (보수층) 국민의미래 60, 더불어민주연합 9, 조국혁신당 8



- (중도층) 조국혁신당 24, 더불어민주연합 22, 국민의미래 21



- (진보층) 조국혁신당 42, 더불어민주연합 39, 국민의미래 6



(이동통신 3사 제공 무선전화 가상번호 무작위 추출 통한 전화 조사원 인터뷰,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응답률 14.3%, 자세한 조사 개요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2) 계속 늘어나고 있어



- 3월 1주 15% → 2주 19% → 3주 22%



- 일각에서는 선거가 가까워지면, 더불어민주연합 쪽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현재 남아있는 ‘부동층 15%’가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의사를 표명하면, 오히려 지금의 22%보다 더 올라갈 가능성도 있을 듯합니다.





3. 조국 돌풍 진원지



- ‘비례대표 정당 투표 의향’을 기준으로 보면, △지역으로는 ‘광주/전라’(32%) △남성(25%) △50대(37%) △더불어민주당 지지층(35%) △사무직(29%) △진보 성향(42%) △대통령 직무 부정평가자(37%) △야당 다수 당선 희망(41%) △정치에 관심 많다(29%) 등입니다.



-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진보 성향 시민, 늘 야당 찍던 사람들, 좀더 좁히면 586이 핵심이라고 여겨집니다.





4. 왜 조국 지지하나?



1) 정권 심판론 부각



- 조국을 부른 것은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지난 2년간의 실정에 ‘정권 심판론’이 커지면서 윤석열 정권에 대해 가장 강하게 각을 세우는 조국신당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 특히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을 기점으로 조국신당 지지율이 급상승세를 탄 것을 봐도, ‘정권 심판’에 대한 민심이 조국에게로 모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용산’의 자충수



-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은 숨어야 했습니다. 지난 연말부터 ‘한동훈’을 통해 ‘윤석열’을 가렸을 때는 착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민주당 공천 내홍이 겹쳐 국민의힘 기세가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윤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를 시작합니다. 그때 ‘윤석열이 나서는 게 총선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초기에는 선거개입 아랑곳않고 지역공약 마구 쏟아내니 각 지역구별로는 어느 정도 선거에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입니다. 20번을 넘어가니, 식상하기도 하지만, 현실성에 의문이 생기고, 내놓는 공약이라는 게 몇 조 단위 철도·도로 공약이니, 당장 사과 한 알에도 시름하는 시민들의 needs와의 괴리가 점점 도드라지기 시작합니다.



- 윤 대통령은 ‘관종’ 기질이 상당합니다. 모든 정치인이 ‘관종’입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다른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정무 감각’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정치경험도 없고, 기질도 그렇지 않습니다. 민생토론회나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환호하고, 셀카 찍고 하는 것을 한동훈 위원장보다 윤 대통령이 더 즐기는 것 같습니다. 신문, 방송에 활짝 웃는 윤 대통령의 모습이 자주 등장했는데, 정권심판론을 상기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 것 같습니다.



- ‘용산’의 참모진이 허약합니다. ‘용산’의 분위기 때문에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민생토론회를 이렇게 과하게 잡는 것은 잘못이고, 대통령이 원하더라도, 최소한 인터벌이라도 늘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페이드아웃 되는 형태를 취해야 했는데, 실기했습니다. 관료 출신인 이관섭 대통령실장의 정무 감각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앞서 한동훈 위원장을 직접 찾아가 ‘대통령 뜻’을 전하는 장면부터 기이했습니다. 대통령실장이라면, 그런 조처를 말렸어야 했고, 정 말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야 했는데, 대통령 지시받고 덜렁 한 위원장 찾아가 ‘전언’하는 형태는 대통령실장으로서의 자격이나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관료는 태생적으로 윗사람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가급적 자기 판단을 잘 안하고, 자신이 전면에서 책임지는 일은 피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 결정적인 것은 이종섭 호주대사 건입니다. 법조인 출신들은 대체로 ‘법적으로 문제가 있나, 없나’를 따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역시 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도 과거 장관 후보자들의 흠결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할 때 청와대 회의 등에서 “법적으론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합니다. 윤 대통령도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과정에서 이런 사고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특수부 검사들은 국민여론을 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대사를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커 이를 간과했고, 그 파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아직까지는 ‘용산’ 내부에서 대통령의 이런 결정을 만류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용산’의 분위기가 이렇다면, 앞으로도 윤 대통령이 잘못 판단하면 그대로 이행되는 ‘대통령 리스크’는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 얘기가 중간에 좀 외곽으로 흘렀습니다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조국을 불러낸 1등 공신은 ‘용산’입니다.





3) 민주당 공천 내홍



- 2등 공신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입니다. 민주당 공천을 철저하게 ‘친명’ 위주로 진행하고, 이 과정에서 민주당 지지층들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울 강북을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또 물갈이를 하더라도, 명분을 쌓아가며 했다면, 오히려 박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 과도하게 `내 사람' 위주로, `공정' 이슈까지 건드려 가며, 거칠게 하는 바람에 비판을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주당 공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민주당 지지층 가운데 ‘투표장에 가기 싫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민주당에서 탈당한 ‘새로운 미래’를 대안세력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안’이 나타난 것입니다.



- 민주당 지지층 3명 중에 1명(35%)이 비례대표로는 조국혁신당을 찍겠다고 합니다. 비례대표도 더불어민주연합을 찍겠다는 민주당 지지층은 절반을 겨우 넘는(55%) 수준입니다. 국민의힘 지지층 가운데 83%가 국민의미래를 찍겠다며 이른바 `몰빵' 투표 움직임과는 많이 대조됩니다. 또 조국혁신당을 찍겠다는 사람이 민주연합을 찍겠다는 사람보다 많은 곳이 ‘진보 성향’(42% 대 39%), ‘대통령 부정 평가자’(41% 대 39%), ‘야당 다수 당선 희망자’(41% 대 39%)들입니다. 물론, 여론조사에선 이 정도의 2~3%p 차이는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전통적인 민주당·야당 지지층 가운데에서도 절반 가량이 조국혁신당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민주당 온건층도 지지?



- 절대적 지지세는 낮지만, 부산/울산/경남과 대전/세종/충청에서 조국혁신당 투표의향이 각각 22%, 28%로, 해당 지역 민주연합 투표의향(19%, 21%)보다 더 높습니다.



- 일반적으로 조국혁신당을 ‘조국 팬덤’ 또는 ‘강성 야당 지지층’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당 외곽 지지층이 조국혁신당 쪽으로 쏠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부울경과 충청 지역은 상대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그리 높은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서 민주연합보다 조국혁신당 투표성향이 더 높다는 건, 그동안 느슨하게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때론 스윙보터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이들이, 윤석열 정권에 실망해 야당을 찍으려 하나, 민주당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조국혁신당’이라는 중간 대안을 마련하고 이에 안착하고 있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이 경우, 조국혁신당 상승세로 인해 반사이익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부산의 지역구 민주당 후보들일 것 같습니다.



- 지역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성향별로도 ‘중도 성향’에서 조국혁신당 투표 의향이 24%로, 민주연합 투표 의향(22%)보다 더 높다는 점을 보면, 현재 조국혁신당에는 ‘열성 조국 지지, 강력한 정권심판층’과 ‘중도 성향 민주당 외곽 온건 정권심판층’이 이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그래서 조국혁신당의 상승세를 ‘조국 팬덤 현상’이나, 조국 개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이 문제의 광각을 너무 좁혀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또는 않거나), 아니면 조국 개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떨치지 못해 현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5) 정책이 사라진 선거 구도



- ‘정책 선거는 좋은 것’, ‘정쟁 선거는 나쁜 것’이라는 단순도식은 정치분석적 시각에서는 너무 순진하거나, 때론 긴장을 하지 않는 나태한 어프로치입니다.



- 어쨌든, 정권심판론이 워낙 기세가 높은 상황에서, 짠하고 등장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야당 심판론’으로 정권심판론을 맞서려 했습니다. 패착입니다. 결과적으로 조국혁신당이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을 한동훈 위원장이 열어줬습니다. 만일 이번 선거가 예전 몇 번의 선거처럼 ‘무상급식’, ‘기본소득’ 등 정책 이슈로 맞붙었다면, 조국혁신당이 이에 끼어들기가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권 심판’에 ‘야당 심판’으로 맞서니, ‘정권 심판은 내가 제일 잘한다’고 나서니, 힘을 받을 수밖에요. 그리고 비록 여소야대라고 하나, 여당이 ‘야당 심판론’을 꺼내드는 것은 너무 없어보이고, 스스로 약자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검찰 출신인 한 위원장으로서는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공간인 ‘수사’, ‘심판’에 무게를 뒀는데, 현재까진 시장통 환호에 취해 그냥 하던 것 계속 하는 수준의 ‘초보’티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6) 조국의 초반 전략 성공



- 조국은 처음부터 지역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정권심판을 해야하는데, 야당 분열로 망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야당 지지층의 우려를 처음부터 불식시켰습니다. 이는 ’새로운 미래’가 민주당 대체를 선언했으나, 전혀 힘을 받지 못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신당은 초반에 힘을 잃으면, 중간에 다시 복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조국은 초반에 이 난점을 없애면서 곧바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 또 호남에서는 8년 전 문재인 민주당에 대한 반발로 ‘안철수 국민의당’을 택했으나,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학습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국혁신당은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시켜 ‘민주당 우당’ 성격을 강하게 띄우면서, 지지층들이 부담없이 조국혁신당으로 쏠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7) 대중정치인 조국



- 많은 분석가들이 선거가 가까워지면, 결국 더불어민주연합으로 표가 모이고, 조국혁신당의 기세는 수그러들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조국의 유세 현장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잠깐잠깐 보면서, ‘오히려 유세가 본격화되면, 조국이 더 힘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근 ‘치아라, 마’, ‘너거들 쫄았제’ 등 서울법대 교수의 근엄한 이미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대중 정서를 파고드는 선거유세 등이 눈에 띕니다. 대중정치인으로서 그동안 몰랐던 조국의 장점이 점점 부각됩니다.



- 선거 전략이나, 문안, 로고 등을 봐도 적절한 유머러스 기법까지 조국혁신당의 대중성이 기존 정당을 오히려 능가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이런 대중성이 현재 40~50대 위주인 지지세를 30대 후반층까지 확장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5. 우리 사회에 주어진 조국 숙제



- 조국은 여전히 취약점이 있습니다. 개인의 사적 복수를 공적인 정치로 확장시키는 것 아니냐,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데 곧 감옥에 갈 수도 있지 않느냐, 그간의 삶이 위선적이지 않느냐, 앞으로 뭘 하겠다는 게 없지 않느냐 등등입니다.



-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조국 일가가 그동안 겪은 일들로 인해, ‘위선’ 등 조국의 취약점이 ‘그 정도면 죄값을 치르고도 남은 것 아니냐’는 정서가 꽤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사법적 판결은 어찌할 수 없겠지만, 남은 점은 정당으로서의 조국혁신당이 존재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 조국혁신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선거 뒤 민주당과 합당할 것’이라는 예상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지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조국혁신당을 지지하더라도, 조국혁신당이 일반적 정당으로서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그만한 역량이 있다는 판단도 잘 하지 않는 이들도 꽤 많습니다. 조국혁신당의 과제는 어쩌면, 선거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을 듯합니다. 또 조국혁신당이 국회에 입성하면, 조국은 이제 제도정치인이 됩니다. 제도정치인으로서의 현실적·실재적 인정과 ‘조국 파동’으로 일컬어지는 우리 사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 불식과는 또 어떤 상관관계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의 고찰이 이어질 수 있을 듯 합니다.







② 시선, 클릭!





# 개인사업자 대출연체율, 법인 파산 늘어



- 극심한 서민경기 침체가 정권심판론의 진정한 핵심 진원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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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사회변화상 지표, 바뀌는 트렌드



- 서로 연결되진 않지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 상황을 전합니다. 대부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그 정도를 좀더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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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핸드폰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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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에 계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지방에는 서울보다 좋은 곳이 당연히 더 많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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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Now and Then





어제에 이어 오늘도 봄비가 오고 있네요. 이 비가 그치면 봄이 성큼 다가올 것 같습니다. 오늘은 시사와 무관하게 박인수의 ‘봄비’(1970)를 전해 봅니다.



1980년대 후반 무렵,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박인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을 기억합니다. 온몸을 쥐어짜내 노래를 토해내는 듯한 모습에 ‘아니, 우리나라에도 저런 가수가 있었던가, 왜 여지껏 몰랐지’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박인수의 이력을 알고 나니, 그 장면이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신중현은 미8군에서 소울이 뛰어나다는 박인수를 찾아가 자신의 밴드 보컬로 영입하고, 밴드 이름도 ‘애드4’에서 ‘퀘션스’(Questions)로 바꿉니다. 퀘션스의 1970년 데뷔곡이 이 ‘봄비’입니다. 박인수도 대단하지만, 신중현이 이 ‘봄비’를 작곡한 게 1967년이니, 그 당시에 이런 음악을 작곡하고 불렀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박인수의 불우한 삶을 보면, 한국전쟁의 상흔이 개인의 인생 전반에 이처럼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947년생인 박인수는 평북 길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해 중앙청 설계에 참여한 그 시대 건축업자였고, 섹소폰, 클라리넷, 기타, 장구, 거문고 등 동서양 못 다루는 악기가 없고, 창도 잘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성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어머니와 단둘이 남하했다가, 5살 때 기차에서 어머니 손을 놓쳐(어머니가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아가 됐습니다. 이후 고아원과 미군 부대를 전전하며 유년기를 보내다, 자신을 돌봐준 미군을 따라 13살 때인 1960년 미국으로 입양됐습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흑인들이 거주하는 할렘에서 리듬앤블루스나 솔 리듬을 들으며 이국 땅에서 외로움을 달랬다고 합니다. 그러다 ‘김치를 먹는다’는 이유로 양부모와 불화를 겪다 홀로 귀국합니다. 파양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귀국 뒤, 미8군 무대에서 하우스밴드의 일원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할렘에서 접한 흑인 음악, 유년시절의 한, 외로움이 더해져 짙은 소울이 절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신중현을 만나기 전에도 미8군 스타였던 그는 ‘봄비’로 당시 최고 인기가수 반열에 오릅니다. 그러나 그는 수시로 출연을 펑크내고 잠적하거나, 술을 마시고, 아무나 만나고, 돈을 많이 벌었으나 경제관념도 없이 무절제한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지 않아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유년의 외로움과 버려짐 때문에 늘 사랑을 갈구한 것 같기도 하구요. `봄비'의 히트 뒤, 20여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으나, 어머니는 그때 치매를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두 번 결혼하며 가정을 꾸렸으나, 가정을 돌보지 않아 두번 다 이혼했고, 이후 그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뒤로는 설 무대도 잃고, 음반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발매금지 되는 등 불운이 겹겹이 닥치면서 그는 무너졌습니다. 이후 지방극장가 쇼무대를 전전하며 대중들로부터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다 그가 다시 한 번 반짝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1987년 신촌블루스와 만나 ‘봄비’를 롱버전으로 부르며 ‘한국 록그룹 페스티발’에 함께 나서고, 이듬해 신촌블루스 음반에 이 ‘봄비’를 수록합니다. 10여년 만에 방송에도 다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여전했고, 오히려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랑벽이 다시 도져 또 출연펑크를 내면서 외면받기 시작했고, 이후로는 간간이 이곳저곳 작은 무대에 서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90년대 이후로는 공연 중에 가사를 잊어버리는 등 초기 치매 증세가 닥치면서 무대에 설 수도 없게 됩니다. 이후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고, 저혈당, 췌장암,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등 갖은 병마에 시달립니다. 첫 부인은 불쌍한 그의 모습을 보고 40년만에 재결합해 그를 돌봅니다. 재결합 직후인 2013년 무렵, 병들고 늙은데다,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1시간 전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노쇠한 모습으로 그가 텔레비전에 나온 적 있습니다. 어눌한 말투로 지난 삶을 이야기하다, 마지막에 나와서 ‘봄비’를 부릅니다. 음정도, 박자도, 성량도 예전같진 않습니다만, 그의 노래를 들은 참석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봄비’가 또 다르게 들립니다.



그의 ‘봄비’ 버전 2개 가운데, 23살 때 부른 1970년의 ‘봄비’와 41살 때 신촌블루스와 함께 한 1988년의 ‘봄비’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해 전할까 망설이다, 그래도 귀에 좀더 익을 첫번째 버전을 택했습니다. 1988년의 ‘봄비’는 밴드 연주, 사운드, 코러스, 그리고 지나온 고된 삶의 여정이 더해져 더욱 짙어진 소울까지 음악의 완결성은 더 뛰어납니다. 그래도 1970년의 다소 투박하고 단순한 밴드 연주, 거친 사운드, 무엇보다 원시성의 오리지널리티가 더 이끌립니다. 또 1970년 녹음의 밴드 연주에 신중현이 기타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1970년으로 기울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유튜브 등에서 1988년의 ‘봄비’ 버전과 비교하며 들어볼 것도 권해 봅니다.



(*일부 포털에서는 유튜브 영상이 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시려면, 한겨레 홈페이지로 오시기를 권합니다. 기사 제목 아래 ‘기사 원문’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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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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