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
예산편성권은 헌법이 정한 정부의 고유 권한이다. 예산편성권을 쥔 곳이 기획재정부다. 기재부 힘의 원천이 바로 그 돈이다.
기재부에서 돈을 쓰는(세출) 곳은 예산실이다. 돈을 걷는(세입) 곳은 세제실이다. 국가 가계부의 '펑크'는 통상 걷는 돈에서 시작된다. 세제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제실의 언어'는 틀, 격식, 관습, 관례 등에 닿아 있다.
보수적인 세제실이 파격을 선택했다. 부영그룹이 1억원의 출산지원금을 내걸자, 세제실은 전액 비과세 카드를 꺼냈다. 정부안대로라면 앞으로 기업이 직원에게 주는 출산지원금에 세금이 붙지 않는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격식(格·격)을 깨뜨리는(破·파) 일, 파격 그 자체다.
세제실에 질문을 던졌다. "세제실의 언어가 아닌 것 같다". 기재부 밖에서 이뤄진(윗선에서 내려온) 의사결정이 아닌지 묻고 싶었다.
"기재부의 온전한 의사결정"이라며 "세제실도 파격적일 때는 파격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인구문제에 있어서만은 가장 보수적인 조직마저 파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틀을 깨는 결정이 그냥 나온 건 아니다. 기재부는 지난해 11월 기업 출산지원금 비과세 혜택을 기존 월 10만원에서 2배 인상하는 안건을 국회 조세소위원회에 올렸다. 20년 만의 변화라고 자랑했지만 태도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기재부 관료들은 형평성을 얘기하며 신중론을 펼쳤다.
신중했던 기재부는 '파격'을 접하며 달라진다.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출산지원금을 늘렸다. 정점은 부영이 찍었다. 대통령까지 나서 기업들을 칭찬했다.
지난달말 발표된 '2023년 출생통계'도 태도 변화의 이유가 됐다. 지난해 태어난 아이는 23만명. 부모세대보다 1/3 적다. 축소사회를 넘어 1/3사회의 서막이다. 뭐라도 해야 했다. 폄훼하자면 떠밀린 파격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인구문제에서 파격은 새로운 표준, 즉 뉴노멀(New Normal)이 될지 모른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힘 없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부위원장 한명의 교체로 목소리가 커졌다. 저고위는 파격인사, 파격정책을 예고한다.
일본도 틀을 깬 고민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월 500엔(약 4500원)의 저출산세를 걷는 방안을 추진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저출산 극복을 위한 지출에만 매달리는 우리보단 낫다.
다른 의미에서 청년들은 이미 파격을 택했다. 청년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집값, 사교육비, 그외 숱한 기회비용은 아이 낳을 결심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이쯤되면 아이를 낳지 않는 건 '틀을 깬' 합리적 의사결정이다.
파격이 항상 선(善)일 수는 없다. 박근혜 정부 경제팀에서 유행한 표현인 '지도에 없는 길'도 격식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공과가 있지만 부작용도 적잖았다. 하지만 저출산 문제에 있어선 파격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 부작용을 걱정하기엔 지금의 상황이 정말 파격적 상황이니 말이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이제 파격에 익숙해질 일만 남았다.
세종=정현수 기자 gustn99@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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