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배달, 병원 카운터 봐주기는 일상
원장 집 식사배달, 자녀 등하교 시키기도
교회 나오라 하고 안 나오면 약 끊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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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약을 팔러 온 건지, 병원에 취업한 건지 헷갈릴 정도예요."
A씨는 국내 대형제약사 영업사원이라고 한국일보에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한 대도시에서 50여 개 클리닉(개원의) 영업을 담당한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원장님 수발 들기'는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상. 매주 이틀 정도 오전에 시간을 내 병원 카운터 업무를 담당하고, 병원 식구들 점심식사도 당연한 듯 그가 계산한다. 원장님 중엔 입이 고급이라, 개당 3만 원대 초밥도시락만 먹는 사람도 있다. 도시락이 남으면 원장님 집으로 배달까지 해 드려야 한다. 심지어 해외학회나 여행을 떠나는 원장님을 인천국제공항까지 데려다주고, 귀국할 때는 픽업까지 해준 적도 많단다.
A씨가 원장님들 '노예'를 자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원장님들 부탁을 거절하거나 심기를 조금만 거슬러도, 그들이 A씨 회사의 약을 '끊어 버리기' 때문이다.
영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회사에서 큰 고초를 겪어야 한다. A씨가 밝힌, 믿기 어려운 사례도 있었다. "한 유부남 원장님에게 받은 부탁인데요. 여자친구와 해외여행을 가는데 바빠서 시간이 없다며, 여행계획부터 외화 환전까지 부탁하는 거예요. 불륜까지 대놓고 말할 정도로 저희를 사람 아닌 '노예'로 본다는 얘기죠."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하는 의사들이 3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를 열고 의대 증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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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도시락, 저녁은 법카 결제
최근 의사들이 제약사 영업사원들에게 의사 궐기대회 참석을 강요했다는 글이 논란이 됐다. 의사단체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굴뚝에서 이렇게 폴폴 연기가 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기나긴 세월 이어진 의사와 제약 영업사원 사이의 '초갑을 관계'가 여전해, 의사들의 갑질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7일 본보는 사실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국내·외국계 제약사 영업사원 여섯 명을 상대로 의사 상대 영업 행태를 물어봤다. 그 결과 일부 의사의 갑질 행태는 도를 넘은 수준이었다. 영업사원들은 입을 모아 자신들을 '의사의 심부름꾼'이라고 불렀다.
가장 흔한 것이 도시락 배달과 회식비 대납 등 식사 지원이다. 개원의들은 끼니를 병원 내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 영업사원이 점심식사를 직접 배달하는 때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은 영업사원 법인카드로 계산하는 문화도 여전하다고 했다. 외국계 제약사에 재직 중인 B씨는 "회사 규정상 영업대상에 간호사는 포함되지 않아, 의사가 먹은 건 법인카드로 간호사들이 먹은 건 개인카드로 결제한다"며 "한 번은 30만 원을 사비로 쓴 적도 있다"고 말했다.
현금 확보를 위해 '카드깡'까지 해야 한다. 요즘은 병원이 현금을 요구하지 않는다지만, 영업엔 돈이 들기 마련. 8년차 영업사원 C씨는 "병원 가서 인사를 할 때 사소한 주전부리라도 사가야 하는데 부담이 상당하다"라며 "카드깡 되는 식당 '발굴'도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 집단 사직이 장기화되고 있는 7일 오후 광주 동구 전남대병원 1동 6B 병동에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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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와요, 안 나오면 약 끊어요"
의사들 개인 용무도 봐준다. 자녀 등·하교를 돕거나 컴퓨터 수리까지 한다. B씨는 "처음엔 선의로, 또 감성영업 차원에서 인간적 도움을 줬는데 점점 요구가 과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지방 영업사원 D씨는 "취직하고 선배들이 '원장님 운전기사'를 해야 한다고 해 차를 샀다"며 "한 번은 서울서 학회가 열리는데 의사가 '택시는 싫다'고 해 왕복 6시간을 운전했다"고 말했다.
영업사원에겐 주말도 없다. 의사들의 등산, 골프, 심지어 종교 활동까지 함께해야 하는 경우까지 있다. 영업사원 E씨는 "한 개원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해 거절했더니, 발주가 바로 끊겼다"며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헌금을 사실상 강요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C씨도 "한 병원장이 자기 아들과 주말에 드론을 날리자고 해 사비로 드론을 샀다"며 "다른 사원들은 주말마다 골프장에서 산다"고 말했다.
개원의만 그런 건 아니다. 대형병원 교수 중에도 갑질하는 이들이 있단다. 이들이 개원한다는 소식이 퍼지면, 제약사들이 발벗고 나서 병원 인테리어를 책임져준다. 가령 대형TV는 이 제약사에서, 에어컨은 다른 제약사에서 사주는 식이다. 지원 규모가 1,000만 원대 이상이다 보니 개별 영업사원이 아닌 영업팀 단위로 금품 제공이 이뤄진다고 한다. A씨는 "물론 대부분 의사들은 부당한 요구는 하지 않지만, 의료계가 전반적으로 영업사원을 아랫사람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지방의 한 의과대학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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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처방 전권을 가진 구조 탓
이런 기막힌 갑질이 가능한 건 의사와 영업사원이 '돈'으로 얽힌 공생관계여서다. 제네릭(복제약)이 보편화된 병증은 의약품 선정 전권이 의사에게 있다. 이 약을 안 쓰면 저 약을 쓰면 그만이라, 제약사 간 경쟁이 엄청나다. 의사 지시를 거스를 수 없는 구조다. 중증 환자들이 많아 '약의 성능'이 처방에 기준이 되는 종합병원보다, 개원의들의 갑질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D씨는 "가령 당뇨·혈압은 10개 이상의 약이 경쟁하고 있는데 신규 거래처를 뚫는 것보다 기존 거래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전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성과급을 유지할 수 있으니, 영업사원들도 어느 정도의 갑질은 감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국내 중견제약사에 다니는 F씨는 "오히려 돈과 노력으로 구워삶을 수 있는 의사가 편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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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이 문제는 의사들의 '자정 노력'으로 풀 게 아니라, 구조적 측면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행 의료법 등에 따르면, 리베이트를 받은 자는 1년 이내의 자격정지와 함께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일각에서는 의사가 특정 약을 지정하는 현행 '상품명 처방' 대신, 같은 성분을 가진 약 중에서 선택해서 쓸 수 있는 '성분명 처방'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치권에서도 야당을 중심으로 성분명 처방 법제화 필요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의 이정민 변호사는 "지금도 불법 리베이트가 적발되면 자격정지 등 처벌이 이뤄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개선을 기대하긴 어렵다"며 "의사들이 독점하고 있는 처방 권한을 나눌 경우 특정 제약회사가 의사에게 굽신거리는 일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김재현 기자 k-jeah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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