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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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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남극 빙하에 묻힌 ‘이 중금속’…인간 탐욕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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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구진, 남극 빙하 지하서 얼음 기둥 추출

정밀 분석 결과, 1600년대에 ‘납’ 특이 증가

잉카제국 식민화한 스페인의 ‘은 채굴’ 원인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에도 중금속 오염 증거

경향신문

미국 연구진이 2013~2021년 사이 남극 빙하 아래에서 얼음 기둥을 드릴로 채취해 내부에 함유된 성분을 조사한 결과, 납 성분이 1600년대 초반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지하 100~150m 사이에서 뽑아낸 얼음 기둥. 미국 사막연구소(DRI)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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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년 그려진 포토시 ‘은 광산’ 주변의 모습. 다수의 가옥과 여러 갈래의 통행로 등이 묘사돼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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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가파른 산에 여러 개의 통행로가 닦여 있다. 산기슭에는 가옥이 빽빽하게 들어선 마을이 보인다. 마을 곳곳에는 서양 문화의 흔적인 교회도 있다. 길거리에서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도 눈에 띈다. 한눈에도 이곳이 번화한 동네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1553년, 막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잉카제국의 땅 ‘포토시’ 모습을 담고 있다. 포토시는 현재 볼리비아에 속해 있다.

포토시가 사람들로 북적인 것은 귀금속인 ‘은’ 때문이었다. 1545년 포토시에서 은이 발견되자 스페인은 원주민을 동원해 다량의 은을 채굴했다. 생산량은 엄청났다. 한때 포토시가 전 세계 최대 은 광산 지위에 오를 정도였다. 포토시는 스페인에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줬다. 현재는 은 채굴량이 크게 줄면서 과거 식민 지배의 역사를 되짚는 장소가 됐다.

그런데 당시 은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대기 중으로 방출된 중금속 ‘납’ 때문에 지구 남극 환경이 더럽혀진 사실이 최근 과학계의 현지 조사 끝에 확인됐다. 본격적인 산업화 전이었던 초기 제국주의 시대부터 인간의 욕심이 자연을 파괴한 증거가 나온 것이다.

남극 빙하서 납 ‘이상 증가’


미국 사막연구소(DRI) 소속 과학자들은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오브 더 토털 인바이런먼트’를 통해 남극 빙하 깊숙한 곳에서 추출한 얼음 속 화학 물질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2013~2021년 남극 동부의 빙하 5군데를 선정해 빙하 표면에서 100~150m까지 드릴을 침투시킨 뒤 얼음 기둥을 여러 개 뽑아냈다. 그리고 얼음 기둥 아래에서 위쪽 방향으로 차례차례 어떤 성분이 함유돼 있는지 분석했다. 이러면 약 2000년 전부터 현재까지 남극 빙하에 차곡차곡 쌓인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겉보기에는 청정 그 자체인 남극 빙하에서 연구진은 의외의 물질을 찾아냈다. 납이었다. 납은 1850년대 이후 본격화된 산업화 과정에서 환경에 다량 방출된 중금속이다. 중독되면 정신 이상이나 신체 마비 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업화 한참 전인 1600년대 초에, 그것도 사람이 살지 않는 남극 땅에서 납 농도가 껑충 뛴 분석 결과가 나왔다. 납 검출량은 빙하 1g당 pg(피코그램, 10조분의 1g) 단위로 표기해야 할 만큼 미량이기는 했다. 하지만 서기 1~400년에 쌓인 남극 빙하의 연 평균 납 농도와 비교하면 3배나 많은 수치가 확인됐다. 분명 특이한 변화였다.

연구진은 남극에서 비교적 가까운 대륙인 남미를 납 근원지로 지목했다. 다수의 사람이 거주하던 남미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 다량의 납이 분진 등의 형태로 하늘로 방출되면서 대기권 상층 기류를 타고 남극 상공까지 날아왔고, 결국 눈과 함께 일부가 빙하에 내려앉았다고 추론했다.

은 생산량 ‘1만 배’ 방출


왜 400여 년 전 남미 하늘에 납이 뿜어져 나온 것일까. 연구진은 1533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잉카제국의 도시, 포토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현재는 볼리비아의 일부인 포토시에서는 1545년 은광이 발견됐다. 그 뒤 은 채굴 산업이 번창하면서 1600년대 이 도시 인구는 당시 영국 런던보다 많은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만큼 은을 채굴하기 위한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실제로 당시 포토시는 세계 최대 은광 반열까지 올랐다. 스페인이 초기 제국주의 시대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경제적 원천이 포토시였다.

연구진은 은이 섞인 돌인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만 뽑아낼 때 은광석에 섞인 불순물 격인 납이 방출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구진을 이끈 조셉 맥코넬 DRI 소속 박사는 이번 연구 결과를 소개한 미국지구물리학회 소식지를 통해 “은 1온스(약 0.028㎏)를 생산할 때 납은 최대 1만온스(약 280㎏)까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연구진에 따르면 남극 빙하에서 나온 납은 1580년대 후반부터 1590년대 초반 사이에 일시적으로 줄어든 적도 있다. 연구진은 그 이유를 이 시기 남미에 천연두와 홍역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노동력의 원천인 원주민 수가 질병으로 줄어들면서 은 광산 운영이 어려워지자 대기 중으로 납이 배출되는 일도 잠시 줄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분석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을 분명히 보여준다”며 “중금속 퇴적이 특정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조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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