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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불에 손 넣고도 태연…그런 결기, 일제 겨눈 30살 송학선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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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송학선.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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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젊은 귀족 가이우스 무키우스는 상황이 너무나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로마가 적대국 에트루리아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니. 그들은 과거의 전쟁에서 로마인이 자주 패배시켰던 자들이 아닌가.



포르세나 왕이 이끄는 에트루리아 군대는 로마 성벽 포위 작전을 오래 계속했다. 보급품이 로마 시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도시 외곽 지역에 대한 그들의 통제는 완벽했다. 시내에서는 식료품이 귀해지고 값이 급등했다. 포르세나 왕은 낙관했다. 군사 공격을 하지 않고서도 머지않아 로마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왕정 타도하고 국가적 자부심 회복하겠단 의지





에트루리아가 군사를 일으킨 까닭은 로마 왕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원전 509년 로마에 정변이 일어나서, 244년간 계속되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군주 대신 평민의 투표로 선출된 두 명의 집정관이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다. 포르세나 왕은 새로 들어선 로마 공화정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로마에서 추방돼 자국으로 망명한 전 왕 타르퀴니우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쫓겨난 전 군주는 주장했다. 왕의 축출은 일단 한번 시작되면 흔한 일이 될 거라고. 왕정이 무너지면 하향식 평등만 남고 위대함과 탁월함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질서와 복종을 보존하려면 가장 위대한 제도인 왕정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에트루리아의 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로마 공화정에 대한 간섭 전쟁이었다.



무키우스는 결심했다. 왕정을 타도하고 자유를 얻은 로마인의 국가적 자부심을 보여주자고. 그는 혼자서 적진에 잠입하려 했다. 그러나 허가 없이 그렇게 하다가는 보초병에게 탈주자로 체포될 염려가 있었다. 그는 원로원에 출두했다. 약탈이나 보복이 아닌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겠다고 토로했다. 마침내 출발 허락이 떨어졌다. 그는 옷 속에 단검을 숨긴 채 에트루리아 군영으로 숨어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무키우스는 왕이 좌정한 높은 단 옆의 군중 사이로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적국의 왕이 지척에 있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었다. 고귀한 옷을 입고 주위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사람이 둘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왕이고 누가 그 비서인가. 무키우스는 최선의 판단력을 기울여서 그중 한 사람에게 예리한 칼을 힘껏 들이밀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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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안토니오 펠레그리니, <포르세나 왕 앞의 가이우스 무키우스>. ⓒ 베니스18세기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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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청년 송학선(宋學先)은 도시 하층민 출신이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 서울 서대문 밖 천연동에서 일용노동에 종사하는 아버지(34)와 15살 연하의 어머니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장기에는 정규교육도 받을 만큼 가세가 안정돼 있었다.



그러나 서대문공립심상고등소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09년 그만 가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그로 인해 온 가족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야 했다. 송학선의 교육 경력도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안중근을 존경한 식민지 조선 청년





송학선은 18살 되던 해(1914년)에야 비로소 가족과 다시 합할 수 있었다. 그가 취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대문 근처에 있는 도다(戶田)농구회사에 고용됐다. 그 회사는 석유발동기, 양수기, 정미기, 탈곡기 등의 농기계를 수입하는 큰 규모의 판매상이었다. 이때부터 송학선은 가장 역할을 했다. 늙은 부모와 두 남동생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가정의 안정은 다시 뒤흔들렸다. 1922년 26살 되던 해 가을에 그는 몹쓸 병에 걸렸다. 악성 각기병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됐다. 3~4년이나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동안 최대 의료기관인 총독부병원을 비롯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늙은 부모가 병시중을 들었다. 출입을 못하게 되니 직장도 잃었다.



신체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은 상처받지 않았다. 성품이 정직했고, 또 청결한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안중근을 존경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그림엽서 가게에서 안중근 사진을 구경했다. 그 사진을 잊을 수 없었다. 조선 사람들의 남모르는 흠모를 받는 그의 지사적 삶이 값있게 여겨졌다. 송학선은 제2의 안중근이 될 것을 결심했다.



발병 4년차 되던 해에 좋은 일이 찾아왔다. 29살 되던 1925년부터 병증이 사라졌다. 자유로이 걸었을 뿐만 아니라 힘든 노역에도 종사할 수 있게끔 신체가 회복됐다. 송학선은 재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날카로운 비수를 챙겼다. 길이 24㎝의 서양식 칼을 구해 예리하게 날을 세웠다.



이듬해였다. 1926년 4월26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 순종이 숨을 거뒀다. 언론사들이 호외를 앞다퉈 발행했고, 대문짝만한 관련 기사들이 신문지면을 덮었다. 그날 저녁부터 순종의 거처이자 빈전이 마련된 창덕궁을 향해 군중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길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이 통곡하며 애도를 표했다. 총독부 당국은 극도로 긴장했다. 7년 전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전 민족적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서울 시내 곳곳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쳤다.



송학선은 행동에 나설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창덕궁 빈전으로 조문하러 방문하는 때를 노렸다. 사망 발표가 있던 4월26일부터 창덕궁의 출입문을 지켰다. 27일, 28일에도 그랬다. 돈화문에서 금호문 부근까지 도로를 배회하며 총독 행렬이 눈에 띄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사흘째 되던 1926년 4월28일, 호화로운 자동차가 돈화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총독이 조문차 입궁하는 것이라고 군중 속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학선도 같은 생각이었다. 총독 사진을 눈여겨봤고, 경성 역전에서 실제로 그 얼굴을 보기도 했다. 한 시간쯤 기다렸다. 금호문을 통해 궁 밖으로 나온 그 자동차에는 호화로운 복장을 갖춘 세 명의 일본인이 탑승해 있었다. 그중 한가운데 앉아 있는 살진 얼굴에 부대한 인사가 총독임이 틀림없었다. 송학선은 몰려든 군중 때문에 서행하는 자동차에 뛰어 올라가 총독을 향해 비수를 휘둘렀다. 2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지고 왔소”





무키우스가 찌른 사람은 왕이 아니라 비서였다. 경비병에게 체포된 그는 포르세나 왕 앞으로 압송됐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왕에게 말했다. 나는 로마 시민 가이우스 무키우스다. 나의 적인 당신을 죽이려고 여기에 왔다. 당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결단한 사람이 나 하나뿐인지 아는가. 내 뒤에는 나와 똑같은 명예를 얻기를 바라는 귀족 청년이 300명이나 있다. 한 번에 한 명씩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 것이다.



포르세나 왕은 격노했다. 저자를 산 채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무키우스가 맞받아 소리쳤다. 명예를 중시하는 로마의 남자가 얼마나 신체를 우습게 여기는지 똑똑히 보라고. 그는 오른손을 모닥불 속에 집어넣고서 계속 태웠다. 그러면서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은 젊은이의 초인적인 인내력에 감탄했다. 그 용기는 축복받아 마땅하다면서, 너를 사면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무키우스의 석방을 계기로 양국 사이에 강화 협상이 시작됐다. 그 결과 강화 조약이 체결됐다. 에트루리아 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하는 대신, 로마는 점령했던 에트루리아 영토를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무키우스에게는 ‘스카이볼라’라는 별명이 붙었다. 왼손잡이라는 뜻이었다. 불 속에 집어넣은 오른손을 더 이상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의 용기와 인내가 로마를 구원했다는 명예로운 일컬음이었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티베르강 서쪽의 땅을 하사받았고, 그 땅은 이후 ‘무키우스의 초원’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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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선. 임경석 제공




송학선의 칼을 맞은 자는 사이토 총독이 아니라 사토 도라지로 상업회의소 의원이었다. 일본 중의원 3선 의원을 지낸 거물이었다. 그는 중상을 입었고,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2년 뒤 사망했다.



희생자는 또 있었다. 옆에 나란히 앉았던 일본인 극우단체 국수회 부회장인 다카야마 다카유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들은 재조선 일본인 사회의 유력자였다. 둘 다 경성부협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조문차 창덕궁에 들렀다가 조선 총독으로 오인받아 피습당했던 것이다. 거사 뒤 도주하는 송학선을 쫓던 두 명의 경찰도 중상을 입었다. 조선인 순사 오환필과 기마 순사 일본인 후지와라 도쿠이치가 그들이다.





“만세를 불러라, 만세를 불러”





송학선은 골목 속으로 피신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었다. 몰려드는 경찰들과 대치하던 그는 교문 너머에 몰려 있던 학생들에게 외쳤다. “만세를 불러라, 만세를 불러.”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자신의 행위가 광범한 군중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행동 원형은 3·1운동이었다.



체포된 그는 일제의 사법 절차에 따라 처벌받았다. 그해 7월15일 제1회 공판이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공판의 날이 왔지만, 조금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태도로 재판에 임했다. 일본인 사법관들은 송학선의 행동을 파렴치한 것으로 몰아가려 노력했다. 증거품으로 압수된 칼을 들어 보이며 “강도질할 목적은 아니었는가?”라고 물었다. 송학선은 단호히 대답했다.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지고 왔었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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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현장 원본.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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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송학선의 행동 동기를 가난으로 몰아가려 했다. 살기가 어려워지자 인생을 비관해 헛된 이름이나 남기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송학선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어릴 때부터 동무들끼리 의논한 결과, 일-한 합방 이래 총독 정치에 불만을 품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을 숭배해왔다고 단언했다. ‘잘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일본은 인생 비관한 청년으로 몰아가려 했지만





송학선은 사건이 있은 지 1년 남짓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27년 5월19일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채 고독 속에 세상을 떠났다. 주검은 아버지와 동생이 인수했고, 대현동의 화장장에서 화장됐다.



공동체의 해방을 위해 일신을 희생한 점에서 무키우스와 송학선은 동일했다. 의도가 빗나간 점도 같았다. 그러나 헌신을 기억하는 로마의 방식과 한국의 방식에는 공통점이 적다. 뒷날 로마가 번영할 수 있었던 까닭이 공공선에 기여한 사람을 두텁고 오래도록 기억하는 그들의 방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 참고 문헌



1.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리비우스 로마사> 1, 현대지성, 140~142쪽, 2018년



2. 경성종로경찰서장, ‘京鍾警高秘第4769號, 弔候自殺害ニ關スル件’, pp.10~11, <檢察事務에 關한 記錄 3>, 1926년 4월29일, 국편 한국사DB https://db.history.go.kr



3. ‘금호문사건 제1회공판’, <동아일보> 1926년 7월16일





*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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