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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2030 플라자] 보험 없던 뇌출혈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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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새벽, 응급실이었다. 한 지방 도시에서 환자 수용 문의 전화가 왔다. 사십 대 뇌출혈 환자라고 했다. 의식이 명료하고 출혈량이 많지 않아 응급 수술이 필요하지 않지만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마침 우리 중환자실은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 찾아오려면 서울을 전부 가로질러야 했다. “지금 서울의 다른 병원은 중환자실이 없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문의한 병원에서 모두 수용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 까다로운 이유가 있다. “저희 병원 중환자실은 여유가 있습니다. 병력이나 인적 사항을 알았으면 합니다.” “환자는 동남아 출신 외국인입니다. 보호자로는 남편이 있고 집주인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하고 보험이 없습니다.” “치료는 모두 받겠다고 하시나요?” “네. 모든 치료를 원하는 상황입니다.” “저희 병원에서 수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병원비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또 거리가 먼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동남아 국적으로 지방 도시에 거주하며 집주인이 보호자라면 일하러 온 사람일 것이다. 보험까지 없다면 불법체류자일 가능성이 있다. 멀리까지 문의가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환자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의료진에게 내용을 공유했다. “사십 대, 동남아 국적, 응급 수술 필요 없는 뇌출혈, 남편이 있고 보험은 없다고 합니다.” “왜 남편이 있는데 보험이 없나요?” “부부가 동남아 사람 같은데요?” 이렇게 답하고서야 질문의 의도를 이해했다. 보통 다문화 가정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는 외국인 부부 같다고 했다.

두 시간 뒤 환자가 도착했다. 환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실려 들어왔다. 소견서에는 화장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고 적혀 있었다. 가져온 시티(CT)에서는 뇌출혈이 분명했다. 나는 환자에게 갔다.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곁에 있었다. “환자분 머리가 많이 아프신가요?” 둘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번역기를 켜서 소리쳤다. “뇌출혈이라고 알고 계시죠?” 화면을 보여주자 남편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아마 한국어가 가능한 집주인에게만 설명했거나 소통의 한계로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남편은 번역기를 틀어 낯선 언어로 말했다. “아내가 죽을 예정을 가졌습니까?” 나는 다시 번역기에 소리쳤다. “사망 확률은 낮습니다. 다만 입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이렇게 목 놓아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타국에서 사고를 겪었고 낯선 곳으로 실려 와서 나를 만났다. 낯섦과 두려움을 이길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상당한 것 같았다. 그의 스마트폰에는 본국에 맡겨둔 것으로 보이는 아이 둘의 사진이 있었다.

다행히 추가로 촬영한 CT에서 뇌출혈은 그대로였다. 의식 또한 여전히 명료했다. 중환자실로 입원해서 치료받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원무과에서 입원을 위해선 지불 보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보험 없이 중환자실에 입원하면 병원비는 적어도 천만 원 이상 나온다. 몇 백만 원을 우선 보증해야 입원할 수 있다는 말에 남편은 다시 울었다. 그가 번역기로 보여준 문장은 이랬다. “큰돈을 알았지만 몰랐습니다. 정말 천만 원이 맞습니까?”

그에게는 명백히 치료비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내를 놓는 일 또한 상상할 수 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마 아내는 부부를 넘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는 아내의 몸이 자신의 몸인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이미 죽음이 찾아오기라도 한 듯. 그런데 경미한 뇌출혈은 별다른 처치 없이 낫기도 한다. 다만 일부러 집에 가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비용이 문제라면 귀가해서 아내를 잘 돌봐주세요’라고 귀띔하면 좋은 의사일까? 아니면 이렇게 온전히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게 맞는 것인가. 그는 새벽의 대기실에서 모든 것이 정지한 듯 그대로 울고만 있었다.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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