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 심의관이 2015년 7월27일 작성한 ‘현안 관련 말씀 자료(파일명 ‘과거 왜곡의 광정’)’ 문건 일부. 이 문건에는 ‘사법부가 대통령(문건 작성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다’는 문장과 함께 여러 법원 판결이 그 사례로 제시돼있다. |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음”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의 한 대목이다. 2018년 5월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법원의 자체 조사를 통해 공개된 이 문건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법원 판결을 대통령의 국정 운영 협력 사례로 제시한 사실에 시민들이 분노했다. 재판 거래 의혹이 불붙었다.
3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의 양 전 대법원장 판결을 살펴보면, 재판부는 법원행정처가 해당 문건을 작성한 것은 청와대에 상고법원 입법 협조를 구하기 위한 설득 전략 중 하나였을 뿐 재판 거래나 개입을 증명하는 자료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법조계에선 ‘앞으로 법원행정처가 이런 문건을 만들어도 된다는 말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문제의 문건들은 2015년 7·8월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작성했다. 문건은 ‘과거 왜곡의 광정(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침)’,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구체적 협력 사례’와 같은 제목 아래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개입 사건, KTX 승무원 사건,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긴급조치 사건 등을 언급한다.
문건은 전교조 사건에 대해 “항소심이 효력을 정지시킨 고용노동부의 법외노조 통보처분의 효력을 되살려 전교조를 법외노조 상태로 되돌려 놓음”이라고 기재했다. 원 전 원장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서는 “현 정권의 민주적 정당성과 직결된 사건에서 원심 유죄 인정 부분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파기환송함”이라고 적었다.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은 2015년 8월6일 양 전 대법원장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면담에 앞서 작성한 ‘청와대 설득 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을 담았다.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조합원들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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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구체적인 사건 쟁점까지 검토한 전교조 사건, 원 전 원장 사건이 재판 거래, 지판 개입 의도가 짙다고 보고 이 부분을 직권남용죄로 기소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청와대 협조를 구하려고 법원행정처 심의관에게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삼아 검토를 시킨 것이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해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해당 문건들이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삼거나 재판 개입을 전제로 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문건을 작성한 법원행정처 심의관들과 피고인들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재판부는 “(보고서 내용은)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청와대 설득 방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 등 정부·여당의 법원 판결에 대한 오해, 편견을 불식시켜 사법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고 했다.
이어 “법원이 반드시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판결만을 선고하는 것은 아니고,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도움을 준 판결들도 있다고 하면서 그 예시를 든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청와대에 협조하기 위해 실제로 재판에 개입해 청와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해 준 대가로 사법부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거나, 재판에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청와대에 ‘유화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판결을 ‘친 정권’으로 소개하는 전략을 사용했을 뿐, 재판 거래나 개입의 실행을 전제로 한 문건이 아니라 직권남용죄 성립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2014년 12월3일 작성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 일부. 이 문건에는 대법원이 고용노동부가 낸 재항고 신청을 인용하는 것이 청와대와 대법원 모두 ‘윈윈’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쓰여있다. |
재판부는 전교조 사건에서 노동부가 낸 재항고를 대법원이 인용하는 것이 청와대와 대법원 모두 ‘윈윈’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문건도 위법하지 않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 문건도 재판 거래나 개입 방안을 검토한 문건이 아니라고 봤다. 검찰은 이 문건은 사건의 결론과 그 이유 구성까지 언급하고 있다며 사법행정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문건은) 오히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으로서 청와대 등 행정부처에 대한 대외관계 업무, 사법행정에 관한 집행 계획의 수립·총괄·조정 업무 등을 담당하던 임종헌이 단지 정무적인 고려 차원에서 재항고 인용 여부 및 결정 시점에 따른 사법부 득실을 예측하고 파급 효과 등을 분석해 보고서로 정리하게 한 것에 불과한 문건이라고 볼 개연성이 크다”고 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에 의하면, 법원행정처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에 박 전 대통령의 면담 말씀자료 초안을 보냈는데 이 초안에도 쌍용차·철도노조·긴급조치 사건 등 특정 사건이 언급돼 있다. 이 내용을 삭제한 것은 정작 청와대였다.
재판부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에서 (법원행정처 초안을 토대로) 대통령 말씀자료를 작성한 후 결재받는 과정에서 우병우 민정수석의 지시에 따라 구체적 사건에 대한 판결들은 모두 삭제됐다”며 “실제 면담에서 박 전 대통령이 사용해 언급한 말씀자료에는 구체적 사건들에 대한 판결례들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양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특정 사건을 언급하며 상고법원 도입 협조를 설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는 문건들이 보고되지 않았다고 봤다. 반면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은 ‘협력 사례 같은 내용이 있는 보고서를 보고받았다’고 진술했다.
박 전 처장은 “정부 여당 쪽에서 좌편향적인 판결이 많다는 비판을 노골적으로 해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판결이 그렇게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는 설득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그에 따라 사건들을 나열을 해 왔다(보고 받았다)”며 “이해되기 싶게 사항별로 분류해 보라고 하면서 임 전 차장에게 예시를 적어 메모를 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설령 박 전 처장이 보고서 작성에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문건 자체가 재판 거래, 재판 개입 의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며 모두 무죄로 결론냈다.
☞ ‘김앤장-청와대-외교부-행정처’ 강제징용 대응협의, 사실 인정한 양승태 재판부···조태열도 언급
https://www.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2401301636011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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