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아르헨티나 물가 33년만에 최고
‘전기톱 긴축’ 선언한 밀레이 대통령
물가통제 폐기·페소화 50% 평가절하
취임 한 달 만에 눌러놨던 물가 급등세
‘전기톱 긴축’ 선언한 밀레이 대통령
물가통제 폐기·페소화 50% 평가절하
취임 한 달 만에 눌러놨던 물가 급등세
미국 달러 대비 가치가 연일 추락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페소화. [사진=로이터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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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예금만 해도 연 이자로 100% 넘게 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기는커녕, 버는 족족 생필품이나 암시장 달러를 사재기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지구 정반대 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이야기입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예금을 안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가가 ‘초인플레이션’ 수준에 도달해 법정 화폐인 페소화 가치가 말 그대로 휴지보다 못한 수준이 됐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강도도 거부하는 쓰레기가 됐을까요. 지난 2022년 8월 아르헨티나와 접한 파라과이 3대 도시 엥카르나시온에 한 마트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당시 점원이 계산대에 있던 페소화를 주자 강도는 “싫다. 안 가져간다. 아르헨티나 페소로 뭘 할 수 있냐”며 거부한 일화는 세계적 화제가 되었습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통계청이 밝힌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연간 211.4%에 달했습니다. 지표로만 봐도 물가가 1년 만에 3배로 튀어오른 건데요. 국민들이 체감하는 고물가는 한 달 새 3배 수준입니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밀레이 행정부가 그간 억지로 누르고 있던 물가 통제정책을 폐기했기 때문입니다. 전임 정부는 ‘공정 가격제도’를 시행하면서 인위적으로 생필품 물가를 억눌러 놨는데요. 지금은 이런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과정으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겁니다.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일주일 만에 쌀, 빵, 우유 같은 식료품값은 50%나 오르고, 650페소(약 1046원)이던 1.5리터 콜라 한 병이 한 달 만에 2배 넘은 1700페소(약 2736원)가 되었다고 하네요.
이 나라는 지난 1989~1990년대에 연 3000~5000%대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는데, 33년 만에 최고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은행예금 이자가 연 100%가 넘어도 저축이 의미가 없습니다. 물가가 연 100% 보다 더 빠르게 오르니 1년 동안 은행예금에 저축하면, 만기에 원금과 이자를 합쳐도 손해입니다.
실제로 명목 이자율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아르헨티나 실질 이자율은 2022년 기준 -10.1%입니다.
메뉴판 가격 매일 바뀌는 나라... 자고나면 모든 가격 상승
지난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집계한 아르헨티나 주요 경제 지표. [자료=대외경제정책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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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식료품점과 가게에선 메뉴판에 적힌 가격이 길게 유지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매일 먹는 김치찌개나 국밥 가격이 매일 오르는 셈입니다.
가장 많이 물가가 오른 영역은 각종 서비스(32.7%), 개인 위생품(32.6%), 의료·민간의료보험(32.6%), 교통(31.7%), 식품·비알코올성 음료(29.7%) 등의 순입니다.
이런 데도 대통령은 ‘긍정적인 결과’라고 자평합니다. 급진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 출신으로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하비에르 밀레이는 취임 한 달을 맞은 라디오 연설에서“애초에 전월보다 45% 정도로 물가가 오를 것으로 예상했는데, 30%라도 좋고 25%에 가까우면 대단히 성공한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한국이었다면 바로 대통령 탄핵 소리가 나왔을 것 같습니다만, 이전 정권의 과오가 너무 크다 보니 아직은 지켜보자는 여론이 더 많습니다.
전임자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은 194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를 지배해온 좌파 페론주의(포퓰리즘) 정당 출신입니다. 2019년 12월 아르헨티나가 IMF로부터 440억달러(약 57조8000억원) 규모의 막대한 구제금융을 신청한 상황에서도 실업급여 2배 인상의 공약을 내세워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2020년 3월 기준 정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88.3%인 3210억달러에 달했고, 이 중 78%가 달러 빚 위주인 대외 부채였습니다.
여기서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페소화를 인쇄기로 찍어내는 실책을 저지릅니다. 때마침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은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죠. 무차별적으로 돈을 찍어낸 결과 지난해 상반기 기준 아르헨티나 광의통화(M2) 공급량은 16조7000억페소로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 집권 이전보다 6배 이상 늘었습니다.
괴짜 경제학자 출신 경제학자 대통령으로…‘전기톱 개혁’ 성공할까
지난해 12월 10일(현지시간)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작년 대선 선거 유세 기간 도중 정부지출 대폭 삭감하겠다며 ‘전기톱’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AP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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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마구 쩍어내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물가 상승은 정부 개입으로 억눌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2022년 11월 ‘공정 가격’ 제도를 도입하고, 3만여 종에 달하는 생필품과 필수 서비스는 매달 가격을 3~4%만 올릴 수 있도록 제한했습니다.
물가가 연 100%씩 오르는데 물건값을 월 3~4%만 올리라고 하니, 작년에도 아르헨티나 월급쟁이들은 매번 월급을 받자마자 물건이나 법정 환율(달러당 400페소)보다 2배 이상 비싼 암시장 달러(달러당 950페소)를 사 모으고, 자영업자들은 ‘공정 가격’ 규제가 없는 제품·서비스만 제공하려는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공식 환율도 2019년 12월 달러당 59.87페소에서 임기 마지막 달인 지난해 11월 달러당 360.48페소로 급등하며 페소값은 6분의 1토막이 났습니다. 달러당 페소값이 추락하면서, 공산품 대부분을 달러로 지불하며 수입해야 하는 아르헨티나의 물가는 더 빨리 상승하게 됐습니다.
이 같은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록스타같은 헤어스타일로 TV와 라디오에 나와 기성 정치권을 비판하며 ‘사이다 발언’을 쏟아낸 경제학자 밀레이를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작년 대선 후보로 유세하던 시절 ‘전기톱’을 휘두르며 “기득권층이 된 기성 정치인들을 제거하고, 방만한 정부 지출을 삭감하겠다”고 외치면서 ‘깜짝 스타’가 됐죠.
선거 공약으로 전임 정부가 망친 중앙은행과 페소화를 폐기하고, 사실상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미국 달러화를 법정 통화로 전면 채택하는 ‘달러화’ 공약과 정부 지출 삭감, 정부 개입 및 각종 규제 철폐 등을 내걸었습니다.
실제로 지난 12월 10일 취임 이후 약 한 달 간 페소화 50% 평가절하, 정부 부처 절반 축소, 공무원 5000명 해고 등 파격 조치를 이어갔습니다. 긴급 대통령령만 300개, 개혁 법안은 664개에 달합니다.
9번이나 ‘달러빚’ 내고 배째라...정부 지출 줄이고 일시적 증세 나서
지난 10년간 아르헨티나의 월간 광의통화(M2) 전년 대비 증가율. [출처=CEI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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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긴축 정책을 밀어붙이는 건 이미 아르헨티나 경제는 수십년간 쌓인 재정적자, 무역적자로도 모자라 국제통화기금(IMF), 월가 은행, 중국 통화스와프 등 세계 곳곳에서 낸 달러 빚을 또 다른 빚을 내서 돌려막기에 급급한 ‘막장’에 처한 상태기 때문입니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아르헨티나는 지금까지 총 9번이나 외채를 꾸고 나서 ‘디폴트’(채무불이행)을 선언했습니다. 쉽게 말해 달러로 돈을 꿔놓고 나서 못 갚겠다고 ‘배째라’라고 외친 겁니다.
이 막장국가를 개혁해보겠다고 밀레이 대통령은 나선 겁니다. 페소화 평가절하로 의도한 건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 만성적인 무역적자부터 해소하겠다는 취지입니다. 재정적자는 정부지출 축소와 일시적 증세로 올해 말까지 ‘0’으로 만들어 해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각종 대중교통·휘발유에 제공하던 보조금을 폐지하고 적자 공기업과 재정자립을 못하는 지방정부를 돕기 위해 쓰이는 중앙정부의 이전지출을 줄이는 등 재정적자는 밀레이 정부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경제의 반복된 위기를 일으킨 무역적자는 단기간에 해결될 가능성이 적어 보입니다. 건국 이래 수십 년간 아르헨티나 역대 정권은 수출 진흥 정책보단 수입품을 대체하는 수입대체 산업 정책을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페소화 평가절하로 수출 경쟁력을 높인다곤 하지만, 현재 아르헨티나 주력 수출 품목의 대부분은 부가가치가 낮은 농축산물과 원자재 등 1차 산업 중심입니다.
수출이 늘어도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없고, 무역으로 얻은 부가 토지와 천연자원을 가진 소수 계층에게 집중되는 구조입니다.
아르헨 빈곤율 40%…‘무상 보편복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총 9번의 아르헨티나 채무불이행(디폴트) 역사. [자료=대외경제정책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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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 정책으로 수출을 늘리고 무역흑자를 달성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빈곤율이 40%에 달하는 상황인지라 언제든 ‘무상 보편복지’를 강조하는 페론주의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계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 2022년 아르헨티나의 주력 수출품목은 1위가 대두박(114억달러·12.9%), 2위가 옥수수(92.6억달러·10.4%), 3위가 대두유 및 가공물(62.4억달러·7.06%)입니다.
그 뒤로 자동차 부품(4..69%), 밀(4.52%), 대두(3.48%), 원유(3.47%), 냉동소고기(2.93%), 바이오디젤(2.04%) 순입니다. 전부 양질의 대규모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지 않고, 넓은 토지나 풍부한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산업들이죠
이에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 산업구조부터 고치는 중장기적인 경제 체질 개선 없이는 밀레이의 급진 개혁도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홍성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남미 팀장은 “밀레이의 정책 가운데 농산물, 원자재 위주 저부가가치 1차 산업구조를 개혁해 고부가가치 수출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구체적인 비전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며 “수십 년간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근시안적 대책 마련에 급급했던 실책을 반복한다면 밀레이 행정부의 급진 개혁 시도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의 연도별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이 비율이 0 보다 작으면 경상수지 적자를 의미한다. [출처=세계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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