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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르포]미국 240분의 1 땅 크기로 '농식품 수출 세계 2위'... 핵심은 기후·땅 아닌 '기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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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농업 기술 가득한 바흐닝언대연구소(WUR) 캠퍼스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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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9일 방문한 네덜란드 바흐닝언 대학 연구소(WUR)의 스마트팜 연구소 'NPEC' 시설 모습.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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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9일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바흐닝언대연구소(WUR) 캠퍼스의 한 온실 안에선 수백 그루의 토마토와 퀴노아 나무가 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종 인공지능(AI) 카메라는 식물 이미지를 분석해 이들의 성장 과정을 시시각각 추적했고 화분에 달린 센서는 각 개체가 물을 얼마나 흡수하는지 분 단위로 쟀다. 시설을 안내하던 연구원 A씨는 "데이터를 분석해 빛 종류나 양, 온도, 습도 등에 따라 각 품종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데이터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토마토가 가장 좋아하는 빛의 종류를 알아내 스마트팜에 적용할 수도 있고, 가뭄이나 추위 등 극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퀴노아 유전자를 찾아 척박한 지역을 개발하거나 기후 변화에 대비할 수도 있다.

내로라하는 생물학자와 엔지니어, 데이터 분석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최고의 토마토'를 찾아내는 일은 왜 중요할까? A씨는 "때론 1㎏의 토마토 씨앗이 같은 무게의 금보다 가치가 높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땅의 크기와 기후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핵심은 기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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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9일 방문한 네덜란드 바흐닝언 대학 연구소(WUR)의 스마트팜 연구소 'NPEC' 시설 모습. WUR 소속 학생과 연구원뿐 아니라 캠퍼스에 입주한 기업과 스타트업 관계자들도 각종 시설을 자연스럽게 공유한다.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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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WUR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미국에 이어 세계 농식품 수출 2위 국가다. 땅 크기는 미국의 240분의 1이지만 농업 분야가 무역 흑자의 80%, 국내총생산(GDP)의 10%, 고용의 10%를 차지한다. 1년 내내 흐리고 비가 와 일조량이 많지 않은 데다 땅도 좁고 척박한 네덜란드가 농업 선두 국가로 불릴 수 있었던 건 기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연구개발(R&D)에 공을 들여온 덕이다. 규모와 자본이 아닌 질과 기술로 이뤄낸 성과다.

네덜란드 농식품 경쟁력의 밑바탕에는 유럽연합(EU)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단일 시장을 추진하는 EU는 여러 나라가 역할을 나눌 수 있고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토마토, 파프리카, 딸기, 화훼 같은 고수익 작물 키우기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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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농식품 수출액 추이. 그래픽=김문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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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궂은 날씨에도 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리 온실을 이용한 대규모 시설원예(스마트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농업의 99%는 온도·습도부터 비료량까지 모든 것을 생육 시기에 맞춰 자동으로 조절하는 스마트팜이다. 정민웅 농촌진흥청 WUR 상주연구관은 "각각의 작물에 가장 잘 맞는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전 세계에서 따라올 곳이 없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팜은 또 ①환경 친화·②지속 가능 기술이다. 토마토 1톤을 노지에서 키울 때 물 60리터(L)와 농약 1.2㎏이 필요하다면 스마트팜에서는 각각 5L, 0.1㎏만 있어도 된다. 같은 노력을 들인다면 1제곱미터(㎡)당 수확량은 6㎏(노지)과 80㎏(스마트팜)으로 13배 넘는 차이가 난다. 관련 전후방 산업도 워낙 많아 네덜란드 정부는 스마트팜을 9개 '국가 최고 산업'에 이름을 올려 전폭적으로 밀고 있다. 릭 노벨 주한 네덜란드대사관 농무참사관은 "네덜란드는 기업농 위주라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유연하다"며 "AI 활용도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다"고 귀띔했다.

"우리는 같이 답을 찾는다" 과학과 사회가 손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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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기어링스 바흐닝언 대학 연구소(WUR) 커뮤니케이션 담당이 지난달 9일 네덜란드 WUR의 스마트팜 연구 시설 NPEC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AI 카메라 등으로 식물 생장 데이터를 쌓고 이를 다양하게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 NPEC의 목적이다.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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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농업의 성공 배경에는 협업하는 문화가 있는데 WUR과 그 캠퍼스의 농식품 산업단지 '푸드밸리'는 그 핵심 장소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100개 넘는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기초 연구부터 기술 개발, 상용화, 정책 제안까지 진행한다.

벤 기어링스 WUR 커뮤니케이션 담당은 "식량 위기에 대비하려면 하나의 해결책만으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에서 출발한 곳"이라며 "정부-산업-시민사회라는 삼각 체계가 유기적으로 협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작물 병해충 이슈 해결을 위해 토양, 대기, 종자 전문가들과 AI 전문가와 데이터 과학자가 모인다. 가축 분뇨 문제를 풀려고 환경공학자부터 발전소 관계자, 신재생에너지 전문가까지 머리를 맞댄다. 이렇게 찾은 해결책은 정부나 산업계를 통해 농가에 적용된다. 2년째 이 과정을 지켜본 정 연구관은 "'지속가능한 농업', '순환농업' 등 하나의 의제가 정해지면 모든 참여자가 같은 방향을 보며 문제를 풀어간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정부는 사회적 합의로 정해진 주제의 중요성을 알리고 여러 주체가 그 해결책을 찾도록 독려하고 전문가들과 산업계는 힘을 보탠다"고 전했다.

네덜란드의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두 나라 상황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영세농이 많아 국가 주도의 대규모 농업 혁신이 쉽지 않다. 우리는 EU 같은 큰 단일 시장이 없어 관리해야 할 작물 종류가 많다. 그럼에도 WUR의 협업 모델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정 연구관은 "한국 정부가 WUR이나 네덜란드 정부와 협력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바흐닝언=글·사진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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