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50인(억) 미만’ 중대재해법 유예 연장 추진
당사자들 “지금도 매일 사고…우린 죽어도 되나”
“준비 안 됐다? 여태 산안법도 안 지켰다는 고백”
경기도 성남 판교제2태크노벨리 신축공사 현장에서 노동자 2명이 추락해 사망한 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인 지난해 2월9일 중대재해기업 사업주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전국건설노동조합원들이 청와대 앞에 놓은 안전화에 향을 피우며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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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하고 열악하면 안전도 당연히 열악하죠. 영세하고 열악하다고 안전 문제를 봐준다는 건, 소규모니까 죽어도 된다는 것인가요?”(건설노동자 하동현씨)
정부·여당이 50인 미만 사업장(공사금액 50억원 미만 현장)에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2년 더 미루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021년 1월27일 중대재해법 제정 당시 ‘준비 부족’을 이유로 준 3년의 유예기간이 내년 1월27일로 끝나는데, 정부·여당은 ‘여전히 현장의 대비가 부족하다’며 이를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현황 분석’을 보면 최근 3년 동안 산재 사고사망자의 80%는 ‘50인(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일어났다.
50인(억원) 미만 소규모·영세 사업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의견은 어떨까. 28일 경향신문은 소규모 건설현장과 제조업 사업장 노동자에게 ‘중대재해법 적용 유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노동자들은 “소규모 사업장은 지금도 안전 사각지대”라며 “중대재해법 적용 유예는 노동자의 생명권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몇만 원 아끼려다 사람 죽는 곳
건설노동자 하동현씨(48)는 전선 지중화(땅 속에 전선을 설치하는 작업) 일을 하며 수많은 소규모 건설현장을 다녔다. 안전보건관리자나 위험성평가, 안전교육 등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뤄지는 현장은 거의 없었다.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 판치는 건설현장에서 안전은 줄여야 할 ‘비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하씨는 말했다.
건설노동자 하동현씨(48·건설노조 충남건설지부장). 하동현씨 제공 |
하씨는 “(불법 하도급 업자들은) 안전관리비도 본인들이 가져가야 할 비용으로 인식해 횡령하곤 한다”고 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충남건설지부장을 맡은 하씨도 현장을 다닐 때 안전화 같은 안전장구조차 거의 전부 직접 샀다. 하씨는 “누군가는 그 비용(안전장구 구입비)을 올려서 자기가 먹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있는 법도 안 지키는 소규묘 현장에 중대재해법 적용을 유예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씨는 “큰 규모 현장은 감리도 상주하고 안전관리자도 있는데, 50억원 미만 현장은 안전관리책임자 의무도 없고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의무도 면제된다”며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에서도 사각지대인데 중대재해법까지 적용을 미루면 위험하다”라고 했다.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주상복합아파트 붕괴 사고 사흘째인 지난해 1월13일 구조대가 실종자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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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소규모·영세 제조업체가 밀집한 경기 반월·시화공단에서 노동안전 활동을 하는 정현철 안산노동안전센터장은 “후진하는 지게차에 경고음 장치가 없어 치여 죽거나, 낡은 슬링벨트(물건을 들어 올리는 벨트)를 갈지 않아 물건이 떨어져 숨지는 등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들이 많다”며 “고작 몇만 원짜리 슬링벨트를 갈지 않아서 사람이 죽고 있다”고 했다.
사고보다 ‘생산 차질’이 중요한 원청
대기업 하청이 대부분인 소규모 제조업체 생태계에서 원·하청 구조도 사고를 키운다. 30인 규모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김현제씨(34)는 차량으로 현대차 공장 생산라인에 자재를 운반하는 일을 한다. 협소한 공간에서 운행하다 보니 자재를 들이받거나 작업자들이 다치는 일도 잦다. 김씨는 “만약 그런 사고로 라인이 멈추면 원청은 책임을 묻는다”면서 “(원청은)왜 사고가 났는지는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김현제씨(34·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장). 김씨 제공 |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장을 맡은 김씨는 “하청업체는 이윤을 더 많이 추구해야 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업무강도가 높고 운행 횟수가 많아지니 사고율이 높아진다”며 “반면 하청업체는 노동환경 개선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다단계 하도급이 일상인 건설현장도 마찬가지다. 하씨는 “건설현장은 수백억 규모 현장도 분리 발주해 50억 미만으로 만들고, 다시 무자격 업자에게 재하도급이 간다”며 “원청에도 책임을 지우는 중대재해법이 적용돼야 공사만 수주하고 어떤 책임도 안 지는 시공사가 최소한의 책임을 지고, 안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고 긴장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월26일 서울 종로구 4.16연대 강당에서 산재·재난 유가족 및 피해자, 종교·인권·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모여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에 즈음한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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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은 ‘소규모·영세 현장은 중대재해법 적용 준비가 안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3월 고용노동부 발주로 한국안전학회가 50인 미만 1442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를 보면, ‘법상 의무를 이미 갖췄거나 준비 중이다’는 응답이 82%에 달했다. 법 적용 전 필요한 조치(복수응답)로는 ‘재정지원(36%)’과 ‘컨설팅 (25%)’이 가장 많이 꼽혔다. ‘적용유예’는 20%로 비교적 적었다.
“모든 노동자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노동자들은 소규모·영세 사업장이라는 이유로 생명안전의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하씨는 “50억원 미만이든 이상이든 노동자는 똑같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며 “이미 3년의 유예를 줬는데, 이를 다시 유예한다는 건 중소규모 노동자 보호의무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법이 시행돼야 원청이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며 “하청업체 입장에서도 내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다치거나 죽지 않게 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정현철 소장은 “중대재해법은 산안법의 핵심 중 기본적인 것들을 가져온 것으로, 중대재해법을 유예해달라는 것은 지금까지 산안법도 어기고 있었다는 자기 고백”이라며 “회사가 작다고 품질경영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나. 사업을 하려면 당연히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도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중대재해없는세상만들운동 본부 소속 시민들이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 모여 중대재해 기업 엄정 수사 및 즉각 처벌을 촉구하는 전국동시다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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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소장은 이어 “사업장에 위험성평가나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이 안착하면 사고는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고,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중대재해법”이라며 “처벌이냐 아니냐를 논하기보다는 사고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기업과 노동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건설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50인(억원) 미만 사업장에 대한 적용 유예 연장이 중대재해법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은 지난 27일 발간한 ‘중대재해처벌법 50인(억원) 미만 적용유예 연장의 문제점’ 이슈페이퍼에서 “대기업 중대재해는 시간 끌기와 불기소 남발로, 중소기업 중대재해는 적용연기로 결국 중대재해법을 사문화시켜 법을 무력화하는 전략”이라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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