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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시위와 파업

“신탁통치 반대” 학생 시위에 좌익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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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반탁학생대회와 학병동맹사건… 목숨 건 ‘전쟁’의 시작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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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세모(歲暮), 한국인의 관심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외상(外相) 회의에 쏠렸다. 성급한 언론들은 협정 발표 전에 외신을 인용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12월 28일(한국 시각) 모스크바에서 공포한 ‘조선 문제에 대한 3상 협정’의 주요 내용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미·영·중·소 4국 주도로 5년간 신탁통치 실시” 등이었다.

협정이 알려지면서 좌우를 막론하고 전 국민적 ‘신탁통치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처음에는 좌익도 김구와 임정이 중심이 된 반탁 운동에 연대했다. 하지만 남북의 좌익이 짜기라도 한 듯 김일성, 김두봉 등이 북조선 정당·사회단체 공동 명의로 “3상 회의 지지” 성명을 발표한 1946년 1월 2일, 남한의 조선공산당(조공)과 인민공화국(인공)의 입장도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했다. 그날 조공과 인공은 ‘반탁’ 시민 대회를 개최한다며 군중을 동원하고는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낭독하는 촌극을 벌였다. 곧이어 조선문학가동맹,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조선학병동맹, 실업자동맹 등 좌익 단체 23곳이 협정 지지를 선언했다.

얼마 후 조공 책임비서 박헌영이 외신 기자회견에서 “조선공산당은 조선에 대한 소련 일국(一國)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며, 5년 후에는 소련의 일(一) 연방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졌다. 1월 15일, 한민당을 비롯한 40여 우파 단체 대표는 반탁과 아울러 공산당과 박헌영 타도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반탁 열기가 고조되던 시기, 일제 말 학병(學兵)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 보성전문(고려대)에 복학한 우익 청년 이철승은 ‘반탁 보전 학생회’ ‘반탁 전국 학생 총연맹(반탁학련)’을 연이어 조직했다. 25년 후 이철승은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기치로 ‘대권’에 도전한다. 1월 18일, 반탁학련은 정동예배당에서 반탁과 반공 의식 고취를 위한 ‘성토 대회’를 개최했다. 이철승과 간부들에 이어 연단에 오른 월남 여학생 임영애는 눈물을 흘리며 북한의 실상을 전했다.

“북한에 진주한 로스케 놈들은 밤이면 쌀과 공장의 기계들을 소련으로 가져가는가 하면 대낮에도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새끼줄에 깡통을 매달아 놓고 서로 옆집으로 연결하여 로스케 놈들이 나타나면 새끼줄을 흔들어 구원을 청하는 실정이다.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있는 놈들이 바로 북한의 공산당 놈들이다.”

성토 대회가 끝나자 “찬탁으로 민족을 팔아먹는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구호와 “소련 영사관으로 달려가자”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1000여 학생이 소련 영사관으로 몰려가 영사 면담을 요청했다. 영사가 미리 자리를 피해, 시위대는 한 명 남은 영사관 직원에게 성토문을 전달했다. 이어서 하지 장군이 머무는 조선호텔, 미국 영사관이 있는 반도호텔로 몰려가 사령관과 영사 면담을 요청하고 반탁 구호를 외쳤다.

조선일보

1945년 신탁통치 반대 집회 모습. 신탁통치는 유엔 감독 아래 자격을 갖춘 국가가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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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 “인민보를 쳐 부수러 가자!”고 외쳤다. 시위대는 인공 기관지 인민보사로 향했다. 반탁을 지지하는 시민들까지 합세해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인민보사에 진입한 학생들은 활자판을 뒤엎고, 인쇄기에 모래를 뿌리고, 그날 찍은 신문을 모조리 불태웠다. 시위대는 이어서 안국동 조선인민당(당수 여운형)을 습격하여 시설 일부를 파괴했다. 시위대는 ‘찬탁의 소굴’을 모두 없앨 기세로 서울시 인민위원회로 향했다.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파괴한 시위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김구와 면담하기 위해 경교장으로 향했다. 경교장은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 국민 총동원 위원회’가 위치한 곳이었다.

시위대가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요란한 총성과 함께 실탄이 날아왔다. 세브란스의전 함영훈이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좌익 청년들이 골목에서 쏟아져 나와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반탁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했다. 반탁 남녀 학생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여학생 7명이 좌익 청년들에게 납치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테러범은 없었고, 그날 밤 경찰의 검문 과정에서 세 용의자가 검거되었다.

용의자 백종선은 시위대 습격을 받은 인민당이 학병동맹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학병동맹 군사부장 박진동은 무장 대원 45명을 이끌고 반탁 시위대를 공격했다고 증언했다. 백종선은 국군준비대 대원이었지만, 같은 좌익 군사 단체인 삼청동 학병동맹 본부에 거주했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경찰은 인사동 네거리 부근에서 학병동맹 대원 박태윤과 이창우를 검거했다. 그들은 다이너마이트 8발과 기폭 장치, 거액을 지니고 있었다.

새벽 3시, 무장 경관 50여 명이 삼청동 학병동맹 본부로 출동했다. 경찰은 본부 건물을 향해 여러 차례 경찰임을 밝히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본부 건물에서는 권총과 기관총 소리가 들리면서 “수류탄 부대는 오른쪽, 권총 부대는 왼쪽, 기관총 부대는 앞쪽” 같은 전투 지휘 음성이 들려왔다. 경찰은 추가로 병력 130명을 지원받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본부를 두 겹으로 에워싸고 공격했다. 19일 새벽, 대대적 검거 작전 끝에 본부에서 생활하던 대원 119명을 검거했고, 권총 1정, 일본도 3자루, 탄환 17발 등 ‘다수’의 증거물을 압수했다. 그 과정에서 박진동, 김성익, 김명근(이달) 등 ‘삼학병’이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경성법전을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가 경리 장교로 근무했던 박진동은 남해군수 박해주의 아들로 훗날 LG그룹을 창업하는 구인회의 맏사위였다.

학병동맹은 좌익 주요 시설들이 우익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본부에서 몽둥이와 목총을 들고 경계를 섰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탁학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찰을 향해 발포한 사실은 물론 총기를 아예 소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태윤, 이창우는 봉화군 춘양면 면장에게 우익 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와 현금을 받았으며, 기차가 밤늦게 도착해서 숙소인 학병동맹 본부로 걸어가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항변했다.

경찰은 반탁학련이 인민보와 인민당 등을 공격한 혐의로 이철승, 이동원 등 관련자 49명을 체포했다. 좌익 학병동맹 관련자 9명, 우익 반탁학련 관련자 4명이 기소되었고, 좌우익 모두 징역 1년 이내, 집행유예 2년 이내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학병동맹사건은 하룻밤 사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엉켜 벌어진 끔찍한 유혈극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좌익과 우익의 목숨 건 ‘전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참고문헌>

김수민 ‘19호 부장검사실: 학병동맹사건 편’ 북한, 1972.5

이완범 ‘조선공산당의 탁치노선 전환 이유’ 정신문화연구 제28-2호, 2005

장병혜·장병초 편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최선우, 박진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연구’ 경찰학논총, 제5-1호, 2010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한국학생건국운동사’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출판국, 1986

홍석률 ‘민주주의 잔혹사’ 창비, 2017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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