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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서윤복, 사기꾼 교포에게 돈 털려 귀국 비행기 타지 못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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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 스포츠 영웅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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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기자들이 운영하는 뉴스레터를 하나 추천하려고 합니다. 같은 문화부 소속 신정선·백수진 기자의 ‘그 영화 어때’ 입니다.(그 영화 어때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6) 우선 무척 재능과 실력이 뛰어난 기자들입니다. 게다가 새로 개봉하는 영화를 도대체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될 때 명쾌하고 정감 넘치는 문체로 직격탄을 날리듯 친절한 안내를 해줍니다. 여기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의 재미까지 더합니다. 뭐 제가 굳이 추천할 필요도 없이 곧 저보다 구독자 수가 많아질 것 같습니다만…

이 ‘그 영화 어때’ 뉴스레터는 추석을 맞아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1947 보스톤’을 그 첫회로 다뤘습니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은 신정선 기자가 다 했으니 줄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영화의 주인공은 손기정(하정우)도 서윤복(임시완)도 아닌… ‘국뽕’ 그 자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승전결로 증식하다 막판 스퍼트를 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팩트와 개연성과 인물설정과 동기와 감정과 감동 같은 요소들이 모두 그 파도에 휘말려 휘발되는 것 같았다는 겁니다(같은 감독의 전작 ‘마이 웨이’처럼 제2의 손기정을 꿈꾸던 마라토너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까지 참전하게 되는 엄청나게 경악스런 스케일은 아니지만서도). 물론 별점을 매기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이 아닌 대부분의 관객에게 그 점은 감상에 지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뽕으로 인한) 순도 높은 감동을 더욱 배가시킬 수도 있는 요소입니다. 이게 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불분명하다고 느끼신다면 신정선 기자의 리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정선 기자 리뷰 ‘뜨거운 애국심도 미지근하게 만드네’

영화는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긴 했으나 아직 나라도 세워지기 전인 1947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과 남승룡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한 청년이 보스턴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태극기를 달고 처음으로 우승했던, 무척 감동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서윤복 선수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면에서 서윤복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미처 보여주지 못했거나 일부러 외면한 서윤복의 역사적 사실들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들을 지적해 보고자 합니다.

조선일보

①1947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 국제 마라톤에 참가한 서윤복 선수가 2시간 25분 39초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결승선에 들어오고 있다. 가슴에 달린 ‘KOREA’(코리아) 글자와 태극기가 선명하다. ②같은 해 6월 22일 승리의 기쁨을 안고 인천에 도착한 서윤복 선수(손에 태극기를 들고 월계관을 쓴 사람). ③백범 김구 선생을 찾은 서윤복 선수 일행. 왼쪽부터 손기정 감독, 서윤복 선수, 김구 선생, 남승룡 선수 겸 코치. /대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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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전차를 쫓아갔다, 진짜였는데 왜 안 나와?

서윤복이 손기정을 만나기 전 제대로 된 마라톤 교육을 받지 않은 채 혼자 뛰어다녔다는 영화 속 설정은 대체로 사실과 부합합니다. 그런데 마구잡이로 뛰었던 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규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선 잠깐 전차 옆을 뛰어가는 서윤복이 승객들과 하이파이브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는데, 기껏 촬영장에서 전차를 작동시키고도 이 에피소드를 빠뜨렸다는 것은 많이 아쉽습니다.

뭔가 하면,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전차를 따라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서윤복은 동대문 근처에 있었던 철공소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는데, 일이 끝나면 전차 운전사에게 가방을 맡기고 그 전차를 쫓아 뛰어간 뒤 서대문 영천에서 다시 운전사로부터 그 가방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리곤 무악재를 달려 넘어 집이 있는 녹번동까지 가는 방식이 일상적인 퇴근길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여기서 좀 의아했습니다. 과연 전차의 속력이 얼마나 됐기에 훈련 삼아 매일같이 그 먼 거리를 쫓아서 뛰어갈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알고 보니 시속 7㎞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지인이 얼마 전 “서울 시내에 전차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 속도 얘기를 해 줬죠.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오히려 교통에 방해된다며 전차 노선을 다 뜯어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옛 전차 노선 중 종로선은 1호선이, 을지로·왕십리선은 2호선이, 마포선은 5호선이 거의 같은 노선을 쏜살같이 다니며 역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지금 지하철보다는 훨씬 느린 전차를 마라톤 훈련에 활용했던 서윤복은 일본인이 버린 헌옷을 주워 입고 리어카 바퀴에서 떼낸 고무를 신발에 덧대 신고 뛰었다고도 합니다.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명필일수록 좋은 붓을 골라 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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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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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냈다고? IMF인가?

영화에선 아직 독립국이 아닌 한국의 선수들이 미국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해 주는 서류인 재정보증서가 마련되지 않아 서윤복 일행의 미국행이 좌절될 뻔할 위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인 군중이 마치 IMF 시절 금모으기 운동처럼 십시일반 돈과 패물을 내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한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서윤복의 회고록을 보면 실제로 이 문제를 도와준 사람들은 미국인들이었습니다.

영화에도 조력자로 등장하는 미 군정청 체육담당관 스미들리 여사(뉴질랜드 배우 모건 브래들리가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는 당시 손기정의 손을 잡아끌고 존 하지 군정사령관 앞으로 가 600달러를 선뜻 내놓으며 “장군도 협조하세요, 성금을 거둬 보냅시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미 군정청 직원들이 1달러씩 냈고, 언더우드 연세대 이사장이 많은 돈을 빌려줘 가까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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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47 보스톤'에서 손기정 역을 맡은 하정우.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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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통닭과 새우젓으로 영양 보충 시켜줬다는데?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손기정과 남승룡은 우수한 마라톤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 ‘조선마라손보급회’를 만들었습니다. 서윤복은 돈암동에 있는 손기정의 집에서 숙식하며 비로소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됩니다. 손기정은 아침마다 장을 봐 선수들의 음식을 차렸는데, 단백질과 염분 보충을 위해 통닭과 새우젓을 많이 먹였다고 합니다. 당시로선 나름대로 과학적인 식단인데, 영화에선 서윤복을 흠모하는 처녀(박은빈)가 있는 식당에서 특식인 고기를 먹이는 장면으로 대체됩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 남승룡의 아내만 나오고 손기정의 아내는 등장하지 않은 것은, 손기정이 일찍 상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서윤복이 마라톤 대회에서 갑자기 뛰어든 개 때문에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는 등의 영화 속 묘사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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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47 보스톤'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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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비행기엔 아무도 타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는 미국까지 갈 때와 마찬가지로 서윤복 일행이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으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사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실제로는 비행기가 아니라 화물선을 타고 18일 만에 귀국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흑역사가 있는데…

보스턴에 도착한 직후 한 교포가 선수단을 초대해 고급 식당에서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이 자리엔 다른 손님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계산을 하려고 보니 초대한 그 교포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던 것이죠. 서윤복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돌아올 때 써야 할 비행기 삯을 그 식당에 주고 귀국할 때는 배를 얻어타야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체육사학자인 손환 중앙대 교수가 얼마 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입니다. 선수단은 그야말로 졸지에 빈털터리가 됐던 것이죠. 보스턴 마라톤은 1980년대 이전엔 상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선수단은 귀국 후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 즉 ‘발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휘호를 써줬다는 것입니다. 이 휘호는 6·25 전쟁 중에 분실됐다고 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서윤복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평생 독립운동을 해도 신문에 한 줄 나지 않았는데, 그대는 겨우 2시간 25분을 뛰고 연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구만”이라는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1950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송길윤·최윤칠(뒷줄 왼쪽부터) 선수가 나란히 1~3위를 차지한 뒤 월계관을 쓴 모습. 가운데 앉은 사람은 1947년 같은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 /조선일보 DB


◇선수 활동 기간으로만 보면 ‘비운의 마라토너’

1950년 4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선 한국 선수인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분명 마라톤 강국이었죠. 1950년 보스턴 대회 불과 두 달 만에 6·25 전쟁이 터지면서 이 환호가 쉽게 잊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선 자막을 통해 1950년 보스턴의 사실을 알리면서도 선수 세 명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서윤복이 또 입상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어떻게 됐던 것일까요. 선수로서 활동한 기간으로만 보면 분명 서윤복은 ‘비운의 마라토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초 보스턴 마라톤 출전은 그 다음 해인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실제로 서윤복의 우승은 아직 나라도 세우지 못한 한국이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초석이 됐습니다. 그러나 손기정이 개막식의 한국 선수단 기수를 맡았던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서윤복은 페이스 난조로 2시간 59분 36초를 기록해 27위에 그쳤고, 이듬해 은퇴한 뒤 오랜 세월 마라톤 지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서윤복은 2017년 별세했고 2년 뒤인 2019년 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2021년, 문화재청은 국민체육공단이 서윤복으로부터 기증 받아 소장한 ‘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을 문화재로 등록했습니다. 그는 손기정·남승룡과 함께 역사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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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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