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불교문화재단, 성철 스님 30주기 맞아 다양한 추모행사 마련
누더기 승복 차림의 성철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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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가 내 아들을 데려갔으니 나는 석가에게 복수할끼다. 저 경호강에 그물을 쳐라.”
올해는 성철 스님 입적 3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지난 25일 낮 추모 사업을 설명하는 기자간담회 후 식사 도중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과 부친 사이의 못말리는 ‘고집 대결’ 에피소드를 소개했습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인 원택 스님은 1972년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생전 21년, 입적 후 30년간 은사를 시봉하고 현양하는 일에 매진해온 불교계 대표적 ‘효(孝) 상좌’입니다.
원택 스님이 소개한 에피소드는 1936년 성철 스님 출가 후 부친이 보인 분노였습니다. 성철 스님은 1912년 4월 경남 산청에서 이상언 씨와 부인 강상봉 씨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성철 스님 집안은 남부럽지 않게 유복했다고 합니다. 유교 집안이었고요.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높은 장남은 얼마나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모았을까요. 소학교 시절엔 하교하는 길에 사라져서 온 동네가 나서서 찾아보니 길에서 책 읽느라 해지는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랬던 아들이 어느날 ‘진리’를 찾겠다며 출가했을 때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느꼈을 경악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성철 스님의 부모님. 부친의 회갑연 때 촬영한 사진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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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유학자였던 부친에게 ‘출가’란 스스로 천민(賤民)으로 떨어지겠다는 것과 다름 없었겠지요. 극력 반대했지만 아들 영주(성철 스님)의 고집도 대단했지요. 결국 아들은 출가했고 분을 못 이긴 아버지는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부친은 아들이 출가할 때까지 살던 집을 허물어 버렸답니다. 출가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였지요. 그 후 경호강쪽으로 옮겨 기와집을 지었다지요. 그리고 하인들을 시켜 경호강에 그물을 치라고 했답니다. 부친의 복수는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데려간 석가, 불교를 향했습니다. “불교는 ‘살생’을 금한다 했제? 나는 살생으로 석가에게 복수할 끼다.”
당시에 경호강은 폭이 좁았다고 합니다. 그물을 치면 물고기 씨가 말랐겠지요. 부친은 날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거둬오게 해서 매운탕을 끓이라 했답니다. 그런다고 해서 출가한 아들이 돌아올 리는 만무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부친이 잠들면 모친은 매일 밤 매운탕 끓이고 남은 물고기를 강에 놓아주었다고 하지요.
출가한 아들은 한국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해인사 범어사 금강산 송광사 수덕사 등 전국을 다니면서 수행하고 깨달음을 점검했지요.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할 때에는 금강산을 찾아온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지요. 주변 스님들의 강권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 유람을 시켜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출가한 장남을 용서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세월은 흘러 성철 스님은 1947년 가을 청담·자운·향곡 스님 등과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걸고 유명한 봉암사 결사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1949년 가을 무렵부터 봉암사엔 공비가 출몰하기 시작했답니다. 결국 스님들이 수행하기 어려워지면서 1950년 3월엔 스님들이 모두 봉암사를 떠나게 됐지요. 성철 스님 역시 기장 묘관음사를 거쳐 통영 천제굴로 옮겨가게 됩니다. 고향인 산청에서는 200리가 안 되는 거리이지요. 아들이 통영에 와있다는 소식을 들은 부친은 아들을 보러 길을 나섰다고 합니다. 이미 고향 마을에까지 성철 스님의 명성은 알려져 있었다고 하지요. “지가 올 리는 없고, 내가 가보지.” 1952년 무렵으로 성철 스님이 출가한 지 16년이 흐른 뒤였다고 합니다.
그 오랜 세월 분이 풀리지 않았던 부친이지만 막상 성철 스님을 만나보니 그 옛날 출가하던 당시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누더기 승복을 걸치고 있지만 형형한 눈빛과 풍모에서 수행자의 기품이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부자간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부친은 “나보고 오래 살라고 하대”라고 말하곤 경호강에 쳐놓았던 그물을 손수 걷었다고 합니다. 무려 16년만의 일입니다.
백련암 신도들이 성철 스님의 고향인 경남 산청 경호강에서 방생법회를 하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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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의 생가터에는 현재 ‘겁외사’가 들어서 있습니다. 백련암 신도들은 매년 봄이면 겁외사를 찾아 경호강에서 방생법회도 하고 있지요. 부친이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싹쓸이하던 강에서 지금은 신도들이 물고기를 놓아주는 행사를 하고 있으니 참 묘한 인연입니다.
경남 산청 겁외사. 성철 스님의 생가터에 세워진 사찰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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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부자(父子)의 고집은 이처럼 대단했다고 합니다. 성철 스님의 대단한 고집도 유명하지요. 그 고집이 부전자전(父傳子傳)이 아닌가 싶은 대목입니다. 어쩌면 성철 스님은 그 고집 덕분에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와해되다시피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좌불와(長坐不臥·눕지 않고 하는 수행정진)와 용맹정진(勇猛精進·잠 자지 않고 하는 수행정진) 등 전설적인 수행도 마찬가지이고요.
선림고경총서. 성철 스님이 선(禪)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자들에게 지시해 번역 출간한 책들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은 이 책들을 전자책으로 무료 보급할 계획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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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불교문화재단은 올해 성철 스님 열반 30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선림고경총서’ 37권 전체를 전자책(e-book)으로 만들어 무료로 공개하는 것입니다. 선림고경총서는 성철 스님이 생전에 선(禪)을 다룬 책이 한문으로 되어 쉽게 읽을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제자들에게 ‘벽암록’ ‘종용록’ 등 대표적 서적을 번역·출간하도록 한 것입니다. 1993년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직전에 완간됐습니다. 이 총서를 열반 30주기인 11월 3일에 맞춰 성철넷(www.songchol.net)에 전권을 무료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10월 14일에는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성철 스님의 불교 인식과 현대적 적용’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와 ‘퇴옹학술상’ 시상식도 열립니다. 또 10월 28일엔 해인사 성철스님 사리탑전에서 3000배를 올리는 것으로 본격 추모행사도 준비돼 있습니다. 성철 스님의 ‘고집’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행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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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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