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운보가 그린 ‘예수의 생애’ 30점 연작에 소강석 목사 해설 붙인 성화집 나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중 '승천'. 한국의 산 위로 갓 쓰고 도포 입은 예수가 승천하는 모습을 그렸다.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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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땋은 처녀에게 에밀레종 비천상(飛天像)의 선녀 같은 천사가 태중에 예수를 가졌음을 알려줍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엔 누런 한우도 있습니다.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어린이를 학살하는 장면에선 ‘포졸’들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은 표주박으로 요단강 물을 떠서 예수에게 세례를 줍니다. 광야에서 갓을 쓴 예수를 유혹하는 사탄은 도깨비 모습입니다.
이 그림들은 한국화의 대가 운보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작품들입니다. 운보의 이 연작은 유명하지요. 김기창 화백은 알려진 대로 청각장애인이었죠. 일곱 살 때 열병을 앓은 후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천재적 소질을 타고난 그는 부단한 노력을 더해 현대 한국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거듭 새로운 화풍(畵風)을 선보였지요. 화면 전체에서 역동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달리는 말 그림을 비롯해 ‘바보산수’ ‘청록산수’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예수의 탄생'. 누런 한우가 아기 예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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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예수의 생애’를 그림 30점으로 그렸습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부터 승천(昇天)까지 예수의 생애 주요 장면을 비단에 담았습니다. 이 연작을 그린 시기(1952~1953)도 중요합니다. 6·25 전쟁 때입니다. 당시 운보는 전북 군산 처가로 피란을 내려갔다가 미국 선교사의 권유로 예수의 생애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예수의 일생을 떠올렸던 것이지요.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다'. 세례 요한이 표주박으로 요단강 물을 떠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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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는 예수를 한복 입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신약의 무대를 한국의 익숙한 풍경으로 묘사했습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예수가 색동옷 입은 어린이들과 만나는 것이지요. 운보는 예수의 생애를 2000년 전, 저 멀리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오신 분의 삶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사탄에게 시험받으시다'. 사탄을 도깨비로 묘사하고 광야의 벼랑이 아닌 우리 산하의 바위로 묘사했다.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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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는 1978년 ‘나의 심혼을 바친 갓 쓴 예수의 일대기’란 글에서 이 연작을 그리게 된 동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의 유년 주일학교를 다녔었다. 나는 가끔 미국에서 발행된 예수를 그린 예쁜 카드를 선물받았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런 그림을 그려 보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나는 그때의 충동을 30여 년 만에 실현시켰다. 나는 네 복음서를 놓고 연구하면서 고심 끝에 29장면의 하도(下圖)를 완성했다.” 그는 당시 예수의 용모에 고심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운보는 ‘범세계적 인물’이면서 ‘세계의 모든 사람, 계급도 없고 남녀 노소 모두에게 정신적 의지가 될 수 있는 인물상’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는 뜻입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탕자 돌아오다'. 주변의 풀까지 말라붙은 모습을 통해 노심초사한 부모의 심정을 그렸다.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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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캐나다 출신 게일 목사에 의해1895년 번역 출간된 ‘천로역정’의 삽화를 참고했다고 합니다. 천로역정의 삽화는 원산의 무명화가가 맡았는데, 풍속화풍으로 판화로 만들었답니다. 그 삽화에서 천당은 남대문과 같은 누각으로, 천사는 선녀로 묘사했답니다. 운보의 그림에서 예수가 입성하는 예루살렘성이 남대문 같은 모습을 한 것이나,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리는 천사가 선녀로 묘사된 것은 그런 까닭인 것입니다. 운보는 “나는 이 ‘예수의 생애’를 통해 우리 한국인들의 자기 체험을 접근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원래 29점이었던 연작은 한 독일인 선교사가 ‘부활 기념 카드’에 쓸 그림을 부탁해서 ‘부활’이 추가되면서 총 30점으로 완성됐지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예루살렘 입성'. 예루살렘 성문을 숭례문처럼 묘사했다.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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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예수의 생애’ 연작은 지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특별전에도 초대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현장을 취재하다가 이 전시도 보았습니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운 갓 쓴 예수의 일생을 그린 성화(聖畵)를 서양 사람들이 흥미롭게 보던 시선이 기억납니다.
최근 그의 작품을 담은 화집 ‘예수의 생애’(쿰란출판사)가 출간됐습니다. 이번엔 시인인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가 작품 해설을 했습니다. 각각의 작품에는 해당 성경 구절을 적고 소강석 목사가 시인의 풍부한 감성과 목회자로서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해설을 붙였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에 대해서는 “마리아는 물레를 돌리던 일손을 멈추고 두 손을 옷고름 위에 다소곳이 올리며 천사의 계시를 받는다. 마리아의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가 문지방과 툇마루를 넘어 들리는 듯하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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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세례 장면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 사이로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선녀의 모습을 한 천사들의 연주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의 노래가 강물 위로 흐른다.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메시아요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의 대관식에는 화려한 금은보석이나 예물 행렬, 군인의 사열도 없었다.”
지난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특별전에 초대돼 전시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김한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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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돌아오다’에는 이런 해설을 붙였습니다. “연로한 아버지는 지팡이도 땅바닥에 던져 버린 채 두 팔을 벌려 거지 행색의 작은아들을 껴안고 애통해하고 있다.(…)멀리서 아버지와 아들의 뜨거운 만남을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수척한 모습이 애처롭다. 주변의 풀들마저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표현하여 작은아들을 기다리느라 애태우며 타들어 갔을 아버지의 심정을 보여준다.”
‘부활’에는 “예수님은 못 자국이 선명한 양손을 벌려 세상을 향하고 있다. 주변의바위와 나무와 풀들도 부활의 주님을 맞는 듯 역동적이고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 무덤은 예수님을 가둘 수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 연작을 담은 성화집(왼쪽)과 해설을 한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쿰란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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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가 이 연작을 그린 지 벌써 70년이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림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자니 운보의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살이던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찾기 위해 한 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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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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