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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오마이갓] 용소막성당 보러 갔다가 거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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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용소막성당 ‘선종완 신부 유물관’

조선일보

강원 원주 용소막성당 내 '선종완 사제 유물관'의 부채꼴 책상. 육각형으로 독서대가 설치돼 동시에 책 여러 권을 펼쳐놓고 대조하며 번역 작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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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경 번역 선구자가 직접 고안한 육각형 책상

그 책상을 본 첫 인상은 ‘록밴드의 드럼 세트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다녀온 강원도 원주 용소막 성당 유물관. 이 유물관에서 본 천주교 성경 번역의 선구자 선종완(1915~1976) 신부의 책상은 부채꼴 육각형이었습니다. 사진을 봐도 특이한 형태이지요? 생전의 선 신부가 고안해 특별히 제작한 책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책상 가운데에는 호롱불이 놓여 있고 좌우로는 책이 책상을 가득 덮고 있었습니다. 독일어판 신약 성서, 스페인어 성서, 일본어판 주석 성서, 인도신약성서, 히브리어 성서 등 각 국어 성경과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 사전이 빽빽했습니다.

선 신부님은 신구약 성경을 한글로 옮긴 분입니다. 1960년대말부터 선종(善終) 직전까지는 개신교의 문익환 목사와 함께 성경을 공동번역했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성경을 책상에 함께 펼쳐놓고 계셨을까요. 정확한 번역을 위해 다른 나라말로는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대조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인터넷에는 자료 사진들도 있는데요, 선 신부님이 책 여러 권을 독서대에 펼쳐놓고 비교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번역하던 선 신부님은 여러 개의 독서대를 펼쳐놓는 대신에 책상 자체를 독서대를 겸하는 모양으로 만든 것이지요. 요즘 컴퓨터로 친다면 여러 개의 모니터를 설치해놓거나 모니터의 ‘창(윈도)’를 열어놓고 동시에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작업한 셈입니다. 마치 록밴드의 드러머가 여러 개의 북과 심벌즈를 두드리듯이 선 신부님은 이 책 저 책을 비교·대조하면서 성경을 한 줄 한 줄 번역했던 것입니다. 책상에는 선 신부님의 번역 노트도 있었습니다. 펜으로 썼다가 지우고 고친 흔적이 빽빽했습니다. 성경 번역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 한눈에 보여주는 책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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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 용소막성당 전경.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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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유물관이 아니라 용소막성당을 보러 갔습니다. 1915년 지어진 용소막성당은 한국의 아름다운 성당으로 손꼽히는 곳이지요. 강원 횡성의 풍수원성당, 충남 아산의 공세리성당 등과 더불어 드라마 촬영지로도 각광받는 곳입니다. 저는 어쩌다보니 그동안 용소막성당을 보지 못해서 구경갔다가 구내의 유물관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용소막성당 앞 마을에서 태어난 선종완 신부

선 신부님 유물관이 1988년 용소막성당 구내에 세워진 것은 이곳이 그의 고향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성당 바로 앞 동네에서 태어난 선 신부님은 이 성당을 다니면서 성직자의 꿈을 키웠답니다. 3대 독자였기 때문에 가족의 반대가 대단했답니다. 그렇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사제의 길을 걸었고, 그 가운데서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하던 성경 번역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로마와 예루살렘 유학까지 했지요. 귀국해서는 만 30세부터 가톨릭대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로 성경 번역에만 매진했지요.

유물관에는 책상 외에도 눈길을 끄는 유물이 많았습니다. 벽에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지도가 걸려 있었습니다. 인쇄된 것이 아니라 선 신부님이 직접 그린 것이었습니다. 진열장에는 온갖 물건이 들어있었습니다. ‘루르드의 호도(호두)’ ‘갈릴레아 돌맹이(오병이어 성당 앞)’ ‘요르단 강가의 돌’ ‘가다꼼바(카타콤베)의 흙(로마)’ ‘로마의 도토리’ ‘쥐엄나무 열매’ 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박물관의 유물을 그린 그림들도 즐비했습니다. 마치 작은 자연사박물관 같았습니다. 유물관을 안내하는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 현장에서 선 신부님의 전기 ‘선종완-깊은 숲 영란처럼 향기롭게’를 구입해 읽으면서 비로소 유물관의 내용들이 잘 이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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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성당 내 선종완 사제 유물관에 진열장. 선 신부가 로마와 예루살렘 유학 중 수집한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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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보여주려 돌맹이 수집하고 유물은 직접 스케치

돌맹이, 씨앗, 흙, 지도 등은 모두 선 신부님이 신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성경의 땅 이스라엘을 입체적으로 가르쳐주기 위해서 수집한 것이었습니다. 지도와 유물 그림은 인쇄된 지도나 슬라이드를 구입할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초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을 찍었지만 필름과 인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카메라는 도로 팔아버리고 손으로 그렸답니다. 그는 이스라엘 유학 시절 거의 1년간 매일 박물관을 찾아가 유물을 그렸다고 합니다. 선 신부님이 이스라엘 유학을 마친 10년 후에도 박물관 관리인은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대단한 열정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성경 번역 비용 마련하려 메추리 사육

‘메추리 사육’ 에피소드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당시 성경 번역에 필요한 비용을 대주는 곳은 없었답니다. 메추리 사육은 자구책이었습니다. 당시 메추리알 한 개 값이 170환이었는데 달걀은 10개가 110환이었다니 고부가가치 부업이었던 것이지요. 선 신부님은 신학교가 있는 혜화동 뒷산에 메추리 사육장을 만들었다네요.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설립

1960년엔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성모영보수녀회)라는 수녀회도 설립했습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는 수녀회입니다. 특히 당시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이 많았는데, 이 수녀회는 학력 제한 없이 수도자로 받았다고 합니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선 신부님은 유산을 수녀회 부지를 매입하는 데 썼다고 합니다. 초기엔 온갖 동식물을 키우며 자립하기 위해 애썼던 수녀회는 지금은 멕시코에도 진출하고 국내에서도 다양한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활동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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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성당 내 선종완 사제 유물관에 전시된 선 신부의 유품.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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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느님도 한국말을 제대로 하시게 되었군요”

책에는 겸손한 영성이란 어떤 것인지,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보여주는 경구들이 많았습니다. “사제는 산 위의 등불이며 그리스도의 신발 끈.” “번역 윤문은 몽둥이 말을 비단 말로 바꾸는 것.” “나는 성서를 파고들 줄만 알았지 성서를 일반 교우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고 교우들의 삶에 성서 정신이 얼마나 미치고, 어떤 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못해 후회됩니다.” “구약을 통해 신약이 풍부하게 되고 신약을 통해 구약이 명료해진다.” “일생을 학문에 몸 바치겠다고 결심하기 전,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공부냐? 친구냐?’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 번역을 마치며)이제 하느님도 한국말을 제대로 하시게 되었군요. 하느님이 우리말을 제대로 하시는 데 이르기까지 이백 년이 걸렸으니 우리말은 어지간히 어려운 말이에요.”

그 시절에 축음기로 클래식을 듣고, 피아노도 연주할 정도의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생활은 검소함 자체였답니다. 한번은 신학생이 선 신부의 숙소를 청소하다가 구두가 너무 낡아 버렸답니다.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선 신부는 “찾아오라”고 했고, 신학생은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왔답니다. 선 신부는 “아직 한참 더 신을 수 있는 신발”이라고 했다네요. 선 신부는 스스로도 “청빈에 대해서는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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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 용소막성당 앞의 안내판. 용소막성당은 천주교 원주교구가 설정한 순례길 코스 중 하나이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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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겸손해야 됩니다” 수녀들에게 남긴 유언

선종을 앞두고 선 신부는 성모영보수녀회 수녀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답니다. “자매 여러분! 항상 마음을 합심하여 어려움을 잘 참고 하느님 사랑으로 모였으니까 여러 모든 고통을 많이 이겨내야 됩니다. 끝까지 겸손하며 가난해야 되고 하느님 사랑으로 남에게 봉사하며 서로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해야 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용소막성당으로 나들이갔다가 뜻밖에 거인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가을 초입의 용소막성당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원주 근처로 나들이 계획이 있다면 용소막성당과 선종완 사제 유물관 방문을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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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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