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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시위와 파업

[朝鮮칼럼] 오정희 작가 반대 시위, 이런게 문학이고 예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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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직접 만든 블랙리스트 백서에도 ‘확인할 수 없었다’ 결론

보수 정권 때 작은 감투 하나 썼다고 문인이 문인을 망신주고 공격하고 그나마 플래카드 맞춤법도 틀려

도대체 문학은, 예술은 무엇인가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는 관객이 몰입하고 배우와 일체감을 느끼며 카타르시스를 향유하는 전통적인 연극에 반대했다. 배우가 갑자기 관객을 향해 말을 건다거나, 연극에 문득 노래를 삽입하는 식으로 몰입을 방해하고 배우와 거리감을 느끼도록 했다. 관객이 연극뿐 아니라 세상 전부를 다시 보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 유명한 ‘소격 효과’ 내지는 ‘낯설게 하기’ 기법이다. 속된 말로 ‘홀딱 깨는’ 장면을 집어넣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다.

소격 효과가 꼭 연극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된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개막 행사를 둘러싼 소란을 떠올려 보자. 오정희 소설가가 홍보대사로 위촉된 데 항의하기 위해 한국작가회의 등을 비롯한 문화 예술 단체들이 코엑스 동문 앞에서 기자회견과 시위를 하고 행사장 안 개막식장에 진입하려다 제지당해 쫓겨났다. 일부 언론은 그 사안을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블랙리스트 실행자 오정희 반대 시위, 김건희 경호원에 짓밟혀!’

책 몇 권을 쓰고 여러 권을 번역한 사람으로서 필자 역시 그 뉴스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사안을 들여다볼수록 몰입할 수 없었다. ‘홀딱 깨는’ 장면이 연거푸 등장했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이 든 피켓에는 “오정희 소설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문학은 사회적 폭력에 불가하다”고 적혀 있었다. ‘불과하다’고 해야 할 곳에 ‘불가하다’고 적어 놓는 이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단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단체가 발표한 입장문을 보니 소격 효과는 더욱 커졌다. “오정희 소설가는 박근혜 정부하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의 최대 온상이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핵심 위원으로 있으면서, 헌법에 보장된 표현과 사상, 양심, 출판의 자유 등을 은밀한 방식으로 위법하게 실행하는 데 앞장선 혐의를 갖고 있다.” 사상, 양심, 출판의 자유를 ‘은밀’하며 ‘위법’하게 실행한 ‘혐의’를 갖고 있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2019년 2월, 문재인 정권 당시 발행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중 2-4권을 펼쳐보자. 당시 민주당 정권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크게 키우며 그야말로 이 잡듯이 샅샅이 털었지만, ‘예술위 위원 오OO가 해당 사업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을 인지하였다는 사실은 확인되나 적극적인 가담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확인하지 못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8년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이었던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 설립추진위원회에 위촉된 민간위원 총 13명에 오정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종환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고발한 장본인이다. 그가 오정희를 한국문학관 민간위원에 위촉했던 것이다. 오정희가 블랙리스트에 적극 가담했다고 볼 수 없다는 ‘블랙리스트 백서’의 소결을 부정하려면 더 나은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오정희는 결국 해촉당하며 명예 대신 멍에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필자는 오정희가 결백하다고 주장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정희를 고발하는 이들에게 어떤 사악한 음모가 있다고 폭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 또한 내가 단정해 말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오정희가 보수 정권 당시 감투를 썼다는 것뿐이다. 결국 묻고 싶은 건 대체 예술이, 문학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가를 두고, ‘나 시인이오, 예술가요, 문학인이오’ 하며 이토록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을 ‘문학의 현실 참여’라 해도 되는지 묻고 싶을 따름이다.

브레히트는 문학의 정치 참여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뒤엎어버린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을 받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문학의 진짜 소명을 잊지 않았다. 그의 시 ‘후손들에게’를 문득 떠올려 본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는,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 다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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