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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청명한 하늘, 금관 꺼내니 갑자기 폭우 내려” 신화 같은 1973년 천마총 발굴 현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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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천마총 발굴 50주년 맞아

원로가 된 당시 조사단원들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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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천마총에서 조사단원들이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를 꺼내 올리는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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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1973년 7월 27일,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분 발굴 현장에서 금관을 꺼내 올리던 날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이었다. 당시 조사단원으로 작업 일지를 작성했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금은 전기가 잘 통하니까 무서워서 순간 금관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고 아래로 뛰었다”며 “조금 지나니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말끔히 개어 다시 봉분에 올라가 상자를 들고 내려왔다”고 이날을 회고했다.

신라 왕릉급 무덤인 천마총이 올해로 발굴 반세기를 맞았다. 1973년 4월 6일 첫 삽을 뜨기 시작해, 금관 등 1만1526점 유물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중 하늘로 비상하는 흰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도(天馬圖) 덕분에 고분 이름도 ‘천마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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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된 금동 천마도. 1500년 동안 엉겨 붙어 있던 흙과 녹을 벗겨 내니, 대나무로 만든 말다래에 장식한 금동 천마가 드러났다. 몸체에는 비늘 무늬, 마름모 무늬가 가득하고 눈과, 귀, 정수리 뒤쪽으로 뻗은 갈기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남강호 기자


1971년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국가가 주도한 첫 번째 기획 발굴이었다.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을 발굴하라고 지시한 박정희 전 대통령 앞에서 당시 김정기 조사단장이 “섣불리 대형 고분을 발굴하기보다 근처의 작은 고분부터 파보자”고 건의해 천마총을 먼저 조사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김 단장은 생전 본지 인터뷰에서 “천마도가 발견됐을 땐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며 “손대는 순간 가루가 될지도 모를 그 천마도를 내가 무덤 바깥으로 들어냈다. 책임져야 할 어려운 일은 직접 하는 게 지휘자의 의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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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천마총을 발굴한 조사단원들. 가운데 모자 쓴 사람이 고(故) 김정기 조사단장이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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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용사’들이 50년 만에 경주에 모인다. 김동현 조사단 부단장, 지건길 연구사, 조사보조원 최병현·윤근일·남시진·소성옥씨. 혈기 넘치던 청년에서 백발 성성한 원로가 된 이들이 6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최 좌담회 ‘천마총, 그날의 이야기’에서 발굴 당시 에피소드와 소회를 들려줄 예정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그해 여름은 가뭄이 극심했는데 왕릉을 파서 그렇다고 시민들 원성이 많았다”면서 “천마총 발굴은 우리나라 유적 발굴과 신라 고고학을 체계화하고, 이후 보존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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