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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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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드론에 붙인 “팔로우 미”... 총격에 갇힌 부부, 살아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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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 매복 30m 떨어진 곳에서 드론으로 ‘안전 지대’ 유도</br>우크라군, 드론 촬영과 통화 감청 토대로 전쟁범죄 저지른 러시아 지휘관 궐석 기소

작년 6월23일, 우크라이나 동부의 주요 도시인 이지움 인근의 한 시골 도로에서 젊은 우크라이나 부부가 탄 차량이 러시아 군인들의 총격을 받았다. 남편 안드리 보호마츠와 아내 발레리아 포노마로바는 이지움에 사는 시부모를 피신시키기 위해 가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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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한 러시아군이 있는 곳으로, 젊은 우크라이나인 부부가 탄 차량이 길을 잘못 들어서는 순간을 우크라이나군 드론이 찍은 장면/다큐멘터리 필름 Follow Me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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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 러시아군이 매복한 도로로 접어들었다. 앞에서 폭탄이 계속 터지자, 부부는 차를 버리고 오던 길로 급히 이동했지만, 계속 길 옆에서 폭탄이 터졌다. 그들이 다시 차로 돌아와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러시아 병사들이 차에 총을 갈겼다. 남편은 다리와 온몸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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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흥건하게 피를 흘린 채 앉아 있는 남편 옆에서, 아내 발레리아 포노마로바가 드론을 발견하고 무릎을 꿇고 도와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다큐멘터리 필름 Follow Me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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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광경을 인근 상공에 있던 우크라이나군 드론이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의 배치 상황을 파악 중이던 우크라이나군 드론 조종 부대는 인근 부대로부터 “한 정체불명의 차량이 이동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추적했다. 그곳은 우크라이나 군인이라면 가지 않을 지역이었다. 드론 부대는 민간인이 탄 차량이 분명하다고 처음부터 확신했다.

그러나 매복한 러시아군과의 거리가 30m밖에 안 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총격을 받은 이들 부부를 구출하는 작전을 펼치기엔 너무 위험했다.

수건으로 응급 지혈을 한 남편은 의식을 잃고 있었고, 아내는 무릎을 꿇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우크라이나군 드론도 배터리 잔량이 10%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드론도 현장에 자동 착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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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군 드론 조종사가 흰 종이에 '나를 따라오라'고 써서 드론에 붙여 날렸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다큐멘터리 필름 Follow Me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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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군 드론 조종사는 드론을 회수해 충전하면서, 묘안을 짜냈다. 흰 종이에 굵은 글씨로 “나를 따라오라”고 썼다. 드론은 다시 남편의 피가 바닥에 흥건한 피습 차량 위로 날아갔다. 아내 발레리아는 “처음엔 드론이 우리편인지, 러시아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가장 고통스러운 절규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드론은 아내에게서 20m 떨어진 곳까지 내려갔고, 남편을 가리키며 구해달라고 외치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기수를 위아래로 계속 끄덕거리며 따라오라는 동작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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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발레리아 포노마로바가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 과정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Follow Me 스크린샷


당시 아내 발레리아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남편의 형제는 “안드리를 살리는 길은 드론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절대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에요. 돌아올 거에요.” 아내 발레리아는 곧 드론을 따라 건너편 도로를 따라 걸었다.

드론은 차량 뒤쪽의 러시아군 매복 장소에서 반대편으로 난 도로로 아내를 인도했다. 아내가 피습 차량에서 200~300m쯤 떨어졌을까, 러시아 병사들이 하나 둘 매복했던 숲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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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남편 안드리 옆으로 하나둘씩 나타난 러시아 병사들/Follow Me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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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발레리아에게 돌아오라고 손짓하며 소리쳤지만, 다행히 발레리아는 뒤쪽 멀리서 나타난 러시아 군인들의 소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약 40m 상공에서 인도하는 드론만 보며 걸었다.

곧이어 러시아군이 도로에 깔아 놓은 대전차 지뢰들이 나타났다. 드론은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발레리아는 ‘이걸 피해서 걸으라’라는 신호로 곧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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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의 지시에 따라, 당시 아내 발레리아가 대전차 지뢰가 깔린 도로의 갓길로 걷는 모습./Follow Me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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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러시아 병사들은 남편 안드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길가 수렁에 던져 버렸다.

한참을 걷던 아내 발레리아는 다른 숲속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군인에 의해 구조됐다. 아내는 남편에게 돌아가려고 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아내 발레리아에게 남편이 수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갈 수 없다”고 막았다.

그리고 30시간 뒤, 남편 안드리는 내리는 빗줄기에 오한(惡寒)을 느끼며 의식을 되찾았다. 몸은 퉁퉁 부었고 걸을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이 수렁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는 고통 때문에 30~40분 걷다가 멈추기를 되풀이한 끝에 다른 편에 있던 우크라이나군 참호까지 왔고, 결국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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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총격을 받은 지 30시간 만에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고 사지를 벗어나 살아난 남편 안드리/Follow Me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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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남편이 도달한 부대는 아내가 있는 부대에 사진을 보내 신원을 확인했고, 부부는 연결 상태가 매우 안좋은 화상 통화를 했다. 남편 안드리는 “당신 아내는 우리가 구했다”는 말을 듣고, 안도하며 펑펑 울었다.

우크라이나군은 이후 드론 촬영 영상을 통해 이 민간인 부부에게 총을 갈긴 러시아군 부대와 지휘관을 확인했다. 러시아 제2근위기계화보병 사단의 클림 케르자예프(25세)가 이끈 무리였다. 케르자예프가 이날 이후 러시아에 건 통화 내역을 감청했고, 그의 소셜미디어도 추적했다. 케르자예프는 러시아의 아내와 친구에게 욕설 섞인 전화로 “사람을 죽였다”고 했고, 아내에겐 “전화 선불 요금을 넣으라”고도 했다.

우크라이나는 21일 러시아 지휘관 케르자예프를 민간인 살해 미수라는 전쟁 범죄 혐의로 궐석 기소했다. 우크라이나 경찰은 “마치 TV로 공포 영화를 보듯이, 그들의 범죄 행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최근 이 부부와 부부를 구조했던 드론 조종사 등의 생생한 증언과 당시 드론 촬영 영상을 편집해 제작한 ‘팔로우 미(Follow Me)’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공개했다.

[이철민 국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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