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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김옥균이 죽었다고 역적 허리와 목을 그냥 붙여두겠는가”[박종인의 땅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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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근대로 가는 길목③ 김옥균의 끔찍한 처형



* 유튜브 https://youtu.be/QyaH9e2sokY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근대로 가던 길목, 그 끔찍한 경로

1896년 2월 11일 조선 국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난 날 아침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바로 그 국왕이 보낸 경찰들에게 노천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내린 명령은 ‘급히 가서 두 사람 목을 베라[急往斬之·급왕참지]’(정교, ‘대한계년사’(한국사료총서 제5집) 上, 1896년 2월 11일)였다. 경찰이 종로에 팽개친 두 시신을 행인들이 처참하게 훼손한 뒤 고종이 한 말은 이러했다. “귀신과 사람 울분을 시원히 풀었다.” 고종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즉시 석방해주라고 명했다. 죄 경중 여부는 따지지 않았다.(1896년 2월 11일 ‘고종실록’) 2년 전인 1894년 봄날에도 똑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풍경 속 주인공은 갑신정변(1884) 주역 김옥균이다. 그해 봄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나라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 시신에 부관참시와 능지처참형이 집행됐다. 이를 기념하는 대사면령도 내렸다. 그리고 고종이 말했다. “요망한 역적 허리와 목을 그대로 붙여 둬서야 되겠는가.”(1894년 음력 4월 27일 ‘고종실록’)

명쾌하고 일관됐던 김옥균의 삶

김옥균은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894년 3월 27일 청나라 상하이에서 죽었다. 마흔세 살이었다. 1884년 부패한 민씨 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내정을 일신하며 대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김옥균은 다섯 살 때 안동 김씨 권세가인 당숙 김병기 양자로 들어가 서울 북촌에 살았다. 1872년 2월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탁월한 봉건적 인재였다. 사람이 영민하고 집안 배경도 좋으니 세도정치 프레임에 안주하면 편히 살다 죽을 인생이었다.

그런데 북촌 고개 아래에 사는 개화파 관료 박규수를 만나며 근대를 알게 됐고 나라가 부패했음을 알게 됐고 청나라 바깥에 일본이 있고 그 바깥에 중국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천하(天下) 대신 어느 나라든 힘만 있으면 중심이 될 수 있는 ‘세계(世界)’가 있음을 알게 됐다. 더 이상 봉건질서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 결과물이 1884년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은 김옥균처럼 북촌에서 박규수로부터 개화를 배우고 일본과 미국에서 개화와 근대의 결과를 목격한 청년들이 만들려 했던 개혁의 비상구였다. 일본 망명 시절에는 수시로 찾아오는 자객 위협에 ‘될 수 있는 한 바보 흉내를 내라’는 친구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조언에 방탕한 생활도 했다.(구스 겐타쿠, ‘김옥균’, 윤상현 역, 인문사, 2014, p77)

그 방탕했던 김옥균이 1894년 3월 ‘민씨 잔당 세력을 타도하고 개화당의 혁신을 도모하기 위해’ 청나라 실세 이홍장을 만나러 상하이로 갔고, 죽었다.(김흥수, ‘김옥균의 최후’, 한국학연구68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23) 죽을 때까지 김옥균에게는 근대와 개화가 화두였다.

조선일보

충남 공주 정안에 있는 김옥균 생가터. 1989년 공주 사람들이 이 들판에 기념비를 세웠다. 공주가 아니라 천안이라는 주장도 있다./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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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불꽃, 반(反)근대 ‘역률 추시’

1894년 4월 13일 김옥균 시신을 태운 청나라 군함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자객 홍종우는 김옥균 관을 작은 배에 싣고 한성 남쪽 양화진에 도착했다. 시신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내각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고종실록’은 이 시신을 살점을 도려내는 ‘능지형’ 방식으로 부관참시하자고 내각이 연명상소했다고 기록했다.(1894년 음3월 9일 ‘고종실록’) 이 가운데는 훗날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 김홍집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주재 외교관들 정보에 따르면 ‘민씨 일파는 강력하게 부관참시를 요구했고’ ‘이에 김홍집 등 개화파는 극구 반대했다’.(’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 보고서)’, 서울대 독일학연구소 역, 신원문화사, 1992, p152)

이 소식을 접한 각국 외교관들이 14일 일본공사관에서 회합했다. 이들은 고종 정부에 시신 훼손 불가 조언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들 의견을 취합한 때는 이미 조선 정부가 시신 훼손을 결정한 뒤였다. 조선 정부는 시신 도착 하루 만인 그날 밤 오후 9시 양화진으로 형 집행인들을 보내 김옥균 시신을 조각 내 버렸다.(국사편찬위,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 3-1-(10) 김옥균의 유해와 홍종우의 한국 도착 및 김옥균의 유해 처분의 건)

시신은 ‘지루한 톱질 끝에 머리가 잘려나갔고, 오른손은 관절이, 왼손은 관절과 팔꿈치 중간에서 절단됐다. 발은 도끼로 잘려나갔다. 등은 7인치 길이에 1인치 깊이로 세 군데 칼집이 났다. 손과 발과 머리는 삼발이에 내걸렸고 나머지 몸과 팔 다리는 땅바닥에 그냥 버려졌다. 집행 완료까지 이틀 걸렸다.’(앞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 보고서’, pp.152~153)

김옥균 시신 처리 방식은 1759년 영조가 ‘역적이 죽고 나서 반역죄를 소급 적용한 처벌은 금지’라고 한 ‘역률 추시 금지’ 원칙을 정면으로 파괴한 형 집행이었다.(1759년 음8월 19일 ‘영조실록’) 영조가 “지키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리라”고 경고한 뒤 법전에 명시한 금지 원칙이다.

영조가 세운 원칙을 135년 만에 처음으로 어긴 지도자가 이 고종이다. 1884년 거리에서 죽은 갑신정변 주역 홍영식 시신을 훼손하고 두 번째 위반 사례였다.“(1884년 음11월 26일 ‘승정원일기’) 김옥균 시신을 토막 내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894년 5월 31일 고종이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했다. 그리고 김옥균 처형 소감을 만방에 밝혔다. “반역죄는 절차를 따지지 않고 바로 처단하는 법이다. 죽었다고 하여 그 요망한 허리와 머리를 그냥 놔둬서는 아니되느니라.”(1894년 음4월 27일 ‘고종실록’) 근대로 향하는 절체절명의 갈림길에서 고종은 왕국 법치(法治)를 택하는 대신 스스로 통쾌한 반(反)근대적 복수를 택하고야 말았다.

또 다른 반근대 형벌, 연좌 처형

김옥균 시신이 산산조각 나고 한 달 나흘이 지난 5월 19일, 전형적이되 잔혹한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의금부에서 김옥균 친아버지 김병태를 처형하겠다고 보고한 것이다. 천안에 살면서 권력과 무관하게 지냈던 김병태는 갑신정변 한 달 뒤인 1885년 1월 6일 체포돼 10년째 천안옥사에 수감 중이었다. 김옥균이 암살된 1894년 김병태 나이는 73세였다. 의금부는 “규례대로 의금부 도사를 파견해 연좌하여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알았다”고 전교했다.(1894년 음4월 15일 ‘승정원일기’) 혁명가 아들을 둔 탓에, 일흔을 넘긴 노인은 그렇게 목이 매달려 죽었다.

연좌 처벌. 이 또한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선포한 ‘노적(孥籍) 추시 금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 처분이었다. 고종보다 100년 이상 앞선 봉건군주들이 세운 원칙을 근대를 코앞에 둔 지도자가 깨뜨리는, 이 기이하고 허망한 역류(逆流).

조선일보

1912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 김옥균 양자인 아산군수 김영진이 일본 도교 아오야마 공동묘지에서 아버지 묘를 발견한 경위, 12월 3일 그 머리카락을 가져와 아산에 이장할 때 풍경이 기록돼 있다./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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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돌아온 김옥균과 딸을 얻은 고종

1894년 12월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치르던 일본 장교가 충북 옥천에서 김옥균 아내와 딸을 발견했다. 갑오개혁정부가 출범한 이후라 이들은 연좌 처형이나 노비 전락을 면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5, 6-(14) 박영효 복작과 갑신죄범사면 및 김옥균의 처·딸 발견의 건)

그리고 나라가 사라지고 1912년 11월 당시 아산군수였던 김옥균 양자 김영진이 일본 도쿄에서 부친 시신 일부가 매장된 김옥균 묘를 발견했다. 양화진 참사를 지켜보던 일본인 친구들이 유해 일부를 빼돌려 일본에 묻은 것이다. 김영진은 그 일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3일 충남 아산에서 성대한 이장식이 열렸다. 살아 있는 정변 동지들과 일본 편으로 돌아선 고관대작들이 모두 참석했다.(1912년 12월 6일 ‘매일신보’)

‘덕수궁 찬시실일기’에 따르면 하늘이 맑던 12월 3일 화요일 덕수궁에 있던 고종은 새벽 2시 아들 순종이 사는 창덕궁에 전화를 건 뒤 잠자리에 들었다. 오전 10시 25분 기상한 고종은 차를 마시고 주치의로부터 건강을 체크받았다. 이어 왕실 위패를 모신 각 전각 담당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 오후 1시 5분 점심을 먹었다. 각종 보고를 받은 고종은 오후 7시 10분 저녁을 먹었다. 그해 5월 25일 고종에게는 막내딸이 태어났다. 한 해 전인 1911년 7월 20일 엄비가 죽고 고종이 가까이 했던 궁녀 양씨가 임신한 딸이었다. 다른 때도 아닌 엄비 상중에 잉태된 딸이다. 아이가 잉태됐을 때 고종은 쉰아홉, 훗날 복녕당 당호를 받은 양씨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이름은 아직 짓기 전이라 그저 ‘아기씨’라 불렸던 이 여자아이는 훗날 덕혜라는 이름을 얻었다.(이상 ‘덕수궁 찬시실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너무나도 끔찍한 방식으로 근대를 팽개친 망국의 군주 일상 같은가. 시중을 받으며 제사를 챙기고 식사를 하고 자식을 챙기는 평이한 일상 아닌가.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에게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편안한 일상’(김윤희, 이욱, 홍준화, ‘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p331) 아닌가.

[박종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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