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서울제일교회서 마당극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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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형규(1923~2016) 목사가 이끌던 1970년대 서울제일교회는 민중문예활동가의 한 터전이기도 했어요. 공연장을 구할 수 없던 문예활동가들에게 교회 본당을 마당으로 내줬고 공연 뒤 빠져나가는 활동가들을 경찰이 덮치는 것도 막아주셨어요. 1970~80년대 그분의 삶에서 ‘살아있는 예수의 상’을 보았죠.”
오는 10일 서울 한국문화의 집 코우스에서 열리는 노래·춤·탈·마당극 <수주탈춤예수전> 1부작 총연출을 맡은 채희완(사진)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의 말이다. 지난해 12월 초연한 이 작품은 수주 박형규 목사가 70~80년대에 다섯 차례나 구속 고초를 겪으며 민주화 투쟁과 빈민 선교에 헌신한 삶이 큰 줄기다. 신진 춤꾼 10여 명이 안무를 맡았고 1970년대 노래운동에 참여했던 안혜경과 진회숙 등이 우정출연한다. 내년까지 제작을 마칠 예정인 2·3부작은 1987년 6월 항쟁을 중심으로 한 90년대 고인의 활동과, 그 이후 21세기에 펼친 빈민 활동을 각각 재현한다.
1970년대 대학가 탈춤운동을 이끈 채 대표는 꼭 50년 전인 1973년 서울제일교회 본당에서 마당극 <청산별곡>(연출 임진택) 안무를 맡아 공연하기도 했다. 그가 연출과 안무, 기획을 맡은 민중 지향적인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 처음 공연된 곳도 1978년 말 서울제일교회였다. <공장의 불빛>은 이번 공연에서 신예 춤꾼과 노래꾼에 의해 ‘극중극’으로 새롭게 재현되며 박 목사가 80년대 권력의 박해로 무려 6년 동안 노상예배를 강요당한 고난도 극으로 꾸몄다.
6일 전화로 만난 채 대표에게 작품을 만든 계기를 물었다. “내년이면 마당극 50년입니다. <청산별곡>(1973년)을 꼽는 분도 있지만 대체로 74년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소리굿 아구>를 전문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측면에서 첫 마당극으로 봅니다. 민족문예운동의 실천적이면서 구체적 작업인 마당극 반세기를 맞아 그 성과를 모아 대규모 총체예술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음악과 춤, 탈춤, 영상을 결합해서요.”
그런데 왜 수주일까? 그는 “박 목사님 1주기 때부터 고인을 기리는 문예작업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며 “이번 기회에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를 거룩하게 하는 삶을 지향한 수주의 행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는 목사님의 삶이 춤과 노래로 생활 속에서 불교를 알린 (신라 고승) 원효에 비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박 목사가 추는 춤을 보면서 감탄했다는 말도 했다. “목사님은 스스로 광대라고도 했어요. 물론 하나님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는 의미에서죠. 하지만 실제로도 춤을 아주 잘 추셨죠.”
그는 이번 작품을 위해 제작한 박 목사의 탈이 “잘 빠졌다”고도 했다. 수주의 탈은 이석금 창작탈 장인이 만들었다. “탈에 박 목사 특유의 경상도적인 그윽한 괄괄함과 기독교적인 그윽한 아우라 그리고 서민적인 고귀함이 잘 드러난 것 같아 만족스러워요. 누구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 목사님의 미소가 워낙 그윽해 별명이 박미소였죠.” (02)322-3658.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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