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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경성]100년前 성탄 “감옥에서 신음하는 형제 생각에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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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3.1운동 투옥신자 많아…일제는 주일학교 가두행진까지 감시

조선일보

3.1운동으로 투옥된 신자들이 많던 1920년 성탄절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 당국은 주일학교 학생들의 가두행진까지 감시할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교계 동향을 주시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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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2월25일 새벽, 무악재 너머 빈민촌의 야경단원 둘이 쌀 2자루와 장작 열 다발을 자전거에 싣고 가던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다. 도둑으로 의심한 야경단원들은 관할 고양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서에 끌려간 이 청년은 뜻밖의 사연을 털어놨다.

그는 경성 시내 공평동 123번지에서 식품 가게를 운영하는 스물여섯 청년 박재양이었다. 어릴 적 가난하게 자랐는데 성탄절 때마다 누군가 백미 닷되와 나무 한단씩을 집에 몰래 두고 가 감격했다고 말했다. 전날 밤 시내 정동교회에서 성탄전야예배를 드린 그는 빈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주려고 밤늦게 그 동네로 가던 길이라고 했다. 산타클로스처럼 몰래 선물을 갖다주려고 이른 새벽, 자전거에 쌀과 장작을 실어날랐다는 얘기였다.(’봉욕(逢辱)한 싼타클로쓰’,조선일보 1938년12월28일)

◇식당에도 성탄 트리, 성탄 찬양대가 새벽거리 돌아

성탄절은 1920년대 조선에서 대중적 명절로 떠올랐던 것 같다. 교회나 미션 스쿨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축하 예배와 공연을 가진 것은 오래됐을 것이다.

일반 식당과 카페에서도 트리를 장식하고 성탄절 분위기를 냈던 모양이다. 1920년 신문에 조선호텔 대식당에 설치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등에 화재가 났다는 기사(‘조선호텔 小火’, 조선일보 1920년12월28일)가 난 걸 보면, 성탄 트리도 유행했던 것 같다.

성탄절 새벽, 동네를 돌아다니며 성탄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도 있었다. ‘▲25일 새벽 빛나는 태양이 아직 세상을 밝히기 전에 ▲경성의 조선인 시가에는 잠자는 시민들을 꿈속에서 부르는듯이 류량한(맑고 또렷한) 창가소리가 들리었다 ▲잠속에서 깨인 사람들 이불속에서 귀를 기울이기를 한참하다가 “올커니…크리스마쓰 찬양대로군’'(‘핀셋트’, 조선일보 1930년 12월26일)

성탄과 조선’(조선일보 1926년12월25일)이란 제목의 사설은 ‘12월25일인 성탄일은 차차로 민중화하여서 아직 그의 신도들에게 국한된 일일지라도 거의 민중적 명절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는 ‘조선의 기독교가 또한 허름하지 아니한 사회적 성가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고 썼다.

조선일보

1938년 성탄절 새벽 도둑 의심을 받고 체포된 사람을 심문했더니, 실은 빈민에게 쌀과 장작을 몰래 나눠주려던 '산타클로스'였다는 미담을 전한 조선일보 1938년 12월28일자 기사.


◇'감옥에서 신음하는 형제 생각에 눈물’

조선의 기독교가 ‘허름하지 않은 사회적 성가’를 가지고 있다고 쓴 건 기독교가 3.1운동에서 펼친 주도적 역할과 관련 있다. 조선,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이후 첫 성탄절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엔 이런 분위기가 담겨있다. ‘금년 성탄절은 어느 회당에서든지 아무리 즐겁고 기쁘게 맞으려한다 할지라도 감옥에서 신음하는 형제를 생각하는 때에는 감개지회를 금치 못하며 몇방울의 눈물도 아니 떨어뜨리지 못할 것인데, 성탄절을 가장 위의(威義) 있고 거룩하게 맞으려고 준비에 분주한 각 교당의 신도들은 장차 어떠한 의식을 베풀어 인상됨이 많고 느낌이 많은 1920년의 크리스마스를 맞으려는가.’(‘설창한화’(雪窓閑話), 조선일보 1920년12월14일)

◇전 인구 1.6~1.7%뿐인 기독교 신자가 3.1운동 투옥자의 20%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된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사실을 성탄절 기사를 빌려 대놓고 언급하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남강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16명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쓴 ‘한국기독교회 100년사’에 따르면, 3.1운동 초기인 1919년 3,4월의 체포자 1만9000여 명 중 기독교인은 3373명(17%)을 차지했다. 6월30일 현재 투옥자 9456명 중에서 기독교인은 2033명으로 전체 21%를 차지했다. 당시 기독교 신자수는 전 인구의 1.6~1.7%인 30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수감자가 20%쯤 될 만큼 많았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만큼 3.1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이다.

◇성탄 행렬이 반일시위로 번질까 경계

일제 당국은 기독교계의 성탄절 행사를 예의주시했다. 축하 행사가 반일(反日)시위로 번질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난 26일은 경성 시내 각 일요학교에서 크리스마스의 탄강(誕降) 축하로 거행하는 바, 오후1시부터 6시까지 연하야 부내 청진동 광남교회를 출발하여 각 교회를 방문하고 축의를 표하며 각 병원 입원 환자를 위하여 위문하였는데, 일대는 일요학교 생도 300명의 보호자를 합하여 악대와 깃발 행력을 하였음으로 당국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엄중히 경계하였다더라.’(‘크리스마스의 연합기행렬, 당국에서 엄중 경계’, 조선일보 1920년12월27일)

어린 학생들의 축하행렬까지 감시할 만큼, 일제의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조선일보

이화학당 학생들이 성탄절을 맞아 생활비를 아낀 돈으로 이재민들에게 나눠줄 옷과 모자 등을 선물했다는 조선일보 1924년 12월23일자 기사와 사진.


조선일보

이화학생들이 생활비와 학비를 아껴 이재민들에게 보낼 옷과 생활물품을 선물했다는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생활비 아껴 이재민 돕기 나서

크리스마스는 대개 빈민 구제를 위한 자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션 스쿨 학생들이 용돈을 모아 이웃을 돕는 선물을 마련했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구세군은 자선냄비 거리 모금을 통해 서대문 구세군 본영에서 매일 빈민 50명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후엔 장작이 없어서 밥도 지어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 국밥을 나눠주기도 했다.(‘주린 자에게 국밥을 나눠준다’, 조선일보 1928년12월22일)

이화학당 학생들은 생활비와 식비를 절약해 모은 돈과 직접 지은 옷과 모자 등을 이재민들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했다. ‘이화학당에서는 이 불쌍한 동포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고자 객창에 고생하는 여학생의 따뜻한 마음으로 자기네 평소의 생활비에서 몇푼씩 알뜰히 절약하야 그 금품을 본사(本社)를 거쳐 이재동포에게 보내게 되었다. 이화고등보통학교 기숙생은 두 학기전부터 쓰는 돈을 절약하야 백원돈을 보내게 되었고 이외 고등과,중등과,대학과 학생 일동은 그 근소한 학비에서 추위에 떠는 이재민에게 아래와 같이 의복을 만들어 역시 본사를 거쳐 이재민에게 보내고 또 돈 6원85전을 따로 거두어 보내게 되었다.’(‘이화 학생의 미거’,조선일보 1924년12월23일)

◇성탄절 내력과 의미 다룬 보도 줄이어

크리스마스 전후로 성탄절의 유래와 의미를 소개하는 사설과 기사를 연달아 실었다. ‘크리스마스! 이는 참 반가운 소식이다. 구세주의 탄생한 날이다’로 시작한 사설 ‘크리스마스’(조선일보 1925년 12월25일)는 ‘예수교는 욱일승천의 세(勢)로써 전 구주를 정복하고 널리 온 세계에 충만하게 되었다’고 썼다. 서구를 지배한 정신 문명의 바탕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예수는 혁명적이었고 따라서 비타협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하는 바는 평화에 있었다’면서 평화를 앞세웠다.

이듬해 성탄절 사설에서도 기독교의 인도주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도덕적 반성에 따른 개신 운동을 주문했다. ‘기독신교가 조선에 수입된 지 45년을 산(算)하고 그의 구교(舊敎·천주교)의 유입은 벌써 수세기의 연원을 가졌다. 기독교의 선각자 교역자 및 그 유심한 사녀(士女)들의 노력이 또한 크기를 기(期)하야 말시 안는다.’ (‘성탄과 조선’,조선일보 1926년 12월25일)

1000만 신자를 헤아리는 요즘 이상으로 30만 신자를 향한 당시 사회의 기대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이만열, 한국기독교회 100년사, 성경읽기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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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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