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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이슈 물가와 GDP

물가·통화가치 잡자니 경기침체 불보듯 …'트릴레마' 빠진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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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계 경제가 '트릴레마' 상황에 처했다. 트릴레마란 그리스어로 숫자 3을 의미하는 '트리(Tri)'와 명제를 의미하는 '레마(Lemma)'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세 가지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두 가지를 악화시켜 마땅한 정책을 펴기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각국의 당면 과제는 경기 침체 국면에서 최소한의 성장을 유지하며 물가를 안정시키고 통화가치 급락을 막는 것이다. 세 가지 중 하나의 목표를 잡으면 다른 두 가지가 망가지는 구조다. 트릴레마에서 예외인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 미국 외 나머지 국가들은 정책 수단이 고갈되는데 해결해야 할 목표는 많아지고 있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매일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데이터를 활용해 미국, 일본, 중국, 한국 등 15개국의 통화·재정 정책을 분석해봤다. 각국은 올해 들어 제각각 다른 정책 행태를 보였다. 시작은 미국이다. 미국은 올 들어 2월부터 본격적인 통화 정책 긴축 행보를 보였다. 지난해 말 연 0~0.25%였던 기준금리는 올해 11월에는 연 3.75~4%까지 치솟았다. 불과 10개월 만에 금리를 3.75%포인트나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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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재정 정책도 긴축 행보를 보였다. IMF가 측정한 구조적 재정수지 지표에 따르면 미국의 2021년 잠재적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중은 2021년 -9.5%에서 2022년에는 -4%대로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추정됐다. 구조적 재정수지는 일시적 경기 변동과 일회성 지출 등의 효과를 제외하고 정부 재정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다. 미국은 2022년 재정적자가 이어졌지만 그 폭은 상당히 줄었다. 이는 정부가 수입에 비해 상대적인 지출 규모를 전년보다 줄였다는 것을 의미해 재정 정책은 긴축 기조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통화와 재정 모두 긴축 행보를 보이면서 인플레이션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잡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한 미국은 자기 나라 물가만 생각한 '이기적인 정책'을 펴면 되지만, 나머지 나라들은 미국 긴축에 따른 '킹달러'와 이에 따른 파급효과를 막아야 하는 것이 새로운 정책 목표가 됐다. 커다란 숙제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킹달러'가 본격화되면 다른 나라에서는 자본이 이탈하고 통화가치가 급속히 떨어진다. 통화가치 하락은 국가신인도 저하로 이어진다. 또 수입물가를 자극해 물가를 더욱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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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치 급락, 물가 급등, 경기 침체 등 삼각 파도가 몰려오고 있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책 수단은 녹록지 않다. 통화가치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면 경기 침체가 가속화된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걷거나 정부 빚인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세금을 더 걷으면 조세저항에 부닥치고 국채를 발행하면 국내 금리가 더 올라가고 국가신인도가 떨어진다. 일부 국가는 외환보유액을 활용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기도 한다. 이 경우 일시적으로 통화가치 하락을 막을 수 있겠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결국 실탄이 떨어져 환투기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이런 고민을 반영하듯 각국의 정책 대응은 제각각이다. 중국은 미국과 정반대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은 올 들어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1년 만기 대출프라임레이트를 연 3.85%에서 연 3.65%로 0.2%포인트 내렸다. 구조적 재정수지 적자 비율도 지난해 5.5%에서 7.9%로 한층 높아졌다. 올 들어 통화와 재정 모두 팽창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도 통화와 재정 모두 확장 일변도 정책을 펼치며 전쟁에 올인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철권 통치국 튀르키예 역시 통화와 재정 정책 모두 확장적이다. 일본도 비슷하다. 일본은 올해에도 '제로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재정은 적자폭이 더 커졌다. 통화 중립, 확대 재정 정책을 펴고 있는 셈이다. 이들 국가는 미국이 주도하는 '통화 긴축' 모드에 반대하면서 일종의 '배 째라'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대외 경제 환경보다는 국내 경기 안정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을 분명하게 내세우는 국가들이다.

일부 국가는 이에 대한 대가도 톡톡히 치르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의 혹독한 제재를 받고 있다. 튀르키예 리라화는 올 들어 이달 11일까지 29%나 폭락했다. 같은 기간 일본 엔화도 18.8% 급락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부동산 가격 급락과 청년 실업 등으로 내수 침체를 막기 위해 확장적 정책을 폈지만 미국에서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고민도 있다. 정부부채 비율이 230%가 넘는 일본은 금리를 올렸다가는 국가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사태에 처할 수도 있다. 중국과 일본은 막대한 규모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어 외환시장 불안이 심해지면 미국 국채를 언제든지 팔 수 있다며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국에 맞설 수 있을지, 또 미국과의 승부는 어떻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캐나다와 호주는 미국과 찰떡궁합이 돼서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캐나다는 올 들어 기준금리를 3.5%포인트 올렸다. 미국과 인상폭이 거의 비슷하다. 구조적 재정적자 비중도 2021년 4%에서 2022년에는 2.7%로 줄었다. 통화와 재정 정책 모두 긴축 기조다. 호주도 올 들어 기준금리를 2.5%포인트 올렸고 재정은 긴축 기조를 이어갔다. 이들 국가의 경제지표는 비교적 안정적이다. 물가는 다소 높지만 성장과 통화가치는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브라질, 멕시코 등 개발도상국들의 정책 조합은 일관적이지 않다. 이들은 기준금리를 올려 통화 정책은 긴축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재정은 상대적인 확장 정책을 펴고 있다. 금리를 올려 자본 이탈은 막고 확장 재정을 통해 국내 경기를 부양시키고 취약계층 보호를 확대한다는 취지다. 199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 진원지였던 남미 국가들은 이번에는 미국발 긴축 쇼크를 비교적 잘 막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뇌관은 남아 있다. '통화 긴축-재정 확대' 조합이 얼핏 보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정책 조합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금리를 올리면서 재정을 늘리는 정책은 상호 모순적이다. 정교하게 정책을 펴지 않으면 시장에서 정부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고 엉뚱한 방향으로 튈 수도 있다. 영국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국은 지난 9월 금리를 올리면서도 감세를 통해 확대 재정 정책을 펴고자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영국이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대규모 국채를 발행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국채 금리는 뛰고 영국 파운드화는 급락했다. 여기에 국가신인도까지 떨어지자 이 정책을 기획했던 리즈 트러스 총리는 결국 낙마했다. 경제적 패닉과 정치적 소용돌이를 거친 후 리시 수낵 총리가 새로 들어서서 증세와 정부지출 감소라는 정반대 정책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트릴레마 시대에 방향을 잘못 잡은 경제 정책은 한순간에 국가를 나락으로 내몰 수 있다.

한국은 올 들어 11월까지 기준금리를 2%포인트 올렸다. 미국에 비해 금리 인상폭이 작다. 반면 IMF가 추정한 구조적 재정적자 비율은 2021년 0.23%에서 2022년에는 -1.61%로 바뀌어 재정 정책 기조는 확장적이다. 금리를 미국처럼 빠르게 올릴 경우 막대한 규모의 가계부채 부담이 늘어나고 극심한 신용 경색이 불가피해 내린 정책 조합으로 보인다.

정책이 어정쩡한 만큼 성과도 뚜렷하지 않다. 통화가치 안정, 성장, 물가 등 아직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원화값은 올 들어 10% 이상 하락했다. 물가는 매월 고공 행진 중이고 경기 침체는 가시화되고 있다. 고물가 속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느 지표 하나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책의 불확실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스콧 베이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이 신문기사 데이터를 토대로 경제불확실성지수를 측정해본 결과 우리나라의 2022년 9월 경제정책불확실성지수(EPU)는 263이었다. 이는 러시아(396), 영국(300)보다 낮지만 미국(204), 일본(142), 중국(242)보다는 높다. 특히 브라질(188), 인도(63) 등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기축통화국이 아니고 무역 의존도가 높으며 자본시장 개방도 잘돼 있는 우리나라에 경제 정책의 트릴레마는 어찌 보면 숙명과도 같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적당한 정책으론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외환위기를 경험했고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 입장에서는 대외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외의 둑을 쌓는 것을 우선적으로 실시하고 다음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순서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는데 재정에서 막대한 돈을 푸는 엇박자로 정책 효과를 무력화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통화 긴축 정책을 펼 땐 재정에서 돈을 풀기보다 기존 예산 집행의 효율성을 높여 실수요자에게 정책의 효과가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정부부처 간 협력은 물론 정치권의 협조도 필수적이다. 정부의 행정력과 정치력을 총동원해 글로벌 위기 국면에서 고차방정식을 풀어내야 한다. 지금까지의 성적은 '중하' 정도다. 앞으로 이를 상위권으로 올려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노영우 국제경제전문기자]

※기사 전문은 매경엠플러스(www.money-plus.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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