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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내 사치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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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프랑스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라는 에르노의 글을 인용하는 뉴스를 보고 나의 사치를 떠올렸다.




지금 내게 사치는 ‘약속 없이 혼자 카페에 들어가 아포가토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다. 수영을 한 뒤 날아갈 듯 가벼운 몸으로 커피 전문점에 가서 에스프레소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얹은 아포가토를 야금야금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나의 단순한 열정, 혹은 사치를 언제까지 누릴지. 일거리가 떨어지거나 기력이 쇠잔해 자주 아포가토를 즐기지 못할 그날이 오기 전에 실컷 즐겨야지.

올해 봄에 갑자기 어머니를 잃은 뒤 나는 자주 카페에 가게 되었다. 슬픈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나를 위로하며 카카오페이나 스타벅스 이용권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는데, 선물함을 열고 친구들의 정성을 하루하루 맛있는 케이크나 음료로 바꾸어 먹으며 힘든 날들을 견뎠다.

‘생돈 주고 커피 마시지 마라. 그거 다 낭비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어긋나지만, 전쟁과 가난을 동시에 겪지 않은 나는 일 없이 카페에 가는 게 괜한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카페인과 아이스크림에 중독되어 끊기가 쉽지 않다. 오십 세가 되기 전까지는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소변을 자주 봐야 하고, 한 잔만 마셔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커피 대신 홍차에 우유를 타서 마셨는데, 사람들과 카페에서 브런치 모임을 하며 이디오피아 시다모의 맛을 알게 되었다. 진짜 커피를 처음 마신 날은 온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리기 바빴는데, 한두 번 마시다 보니 중독되어 요즘은 오후 3시 이전에 마시는 커피는 내 잠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저녁에는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에 우유를 타서 마신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창가 좌석이 비었나? 두리번거린다. 지나가는 사람들, 멋지게 차려 입은 젊은이들을 구경하며 ‘아 벌써 가을이군.’ 모르고 지내던 계절 감각이 깨어난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저 중년의 여인과 중학생(?)은 어머니와 아들이겠지? 내 눈에 걸린 사람들을 한가로이 연구하며 시간을 죽인다. 저 젊은 남녀는 연인 사이인가? 남자도 여자도 멋있네. 어울리는 짝이라고 내가 짐작했던 남과 여는 카페에 들어오더니 남자는 이쪽으로, 여자는 저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둘이 어울려 보였는데...서로 모르는 사이라니.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에게 어울리는 짝을 만나는 행운을 누릴까.

신문이나 잡지사에 원고를 보내기 전후에 나는 고급 식당에 간다. 내 기준으로 고급이지만, 부유한 어떤 이들에게는 중급일 수도 있는 백화점 식당이나 ‘무한 리필’의 샐러드 바 같은 곳. 혼자 살며 영양소를 골고루 갖춘 식사를 하기 힘들어, 건강을 위해 가끔 뷔페 식당에 간다. ‘오늘은 글을 썼으니까(혹은 글을 쓸 테니까), 잘 먹고 사치를 누릴 자격이 있어.’ 내가 받을 원고료의 10분의 1 한도 내에서 메뉴를 고른다. 50만원짜리 수필을 쓴 날은 디저트를 합해 5만원 안팎을 식비로 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알면 ‘얘야 있을 때 아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겠지만,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며 호텔 조식을 즐긴다. 고급에 대한 나의 허기도 언젠가 멈추겠지. 허허로운 나의 단순한 열정, 혹은 사치를 당신도 이해하시겠지.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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