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9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김한수의 오마이갓] 사진 458장으로 되돌아본 오대산 100년 역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암 탄허 만화 스님 사진집 ‘근대 오대산 삼대화상’ 출간

조선일보

만화 스님이 1970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해체보수 공사 중 출토된 불상을 살펴보고 있다. /민족사


김한수의 오마이갓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4

사진 속에선 한 스님이 작은 불상을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보고 있습니다. 1970년 10월 국보 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탑에서 나온 불상을 보고 있는 만화(萬化·1922~1983) 스님의 모습을 담은 희귀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지난 7월말 출간된 ‘근대 오대산 삼대화상’(민족사)란 사진집에 수록됐습니다. 이 사진집을 구해서 보게 된 것은 위에 말씀드린 사진 때문이었습니다. 스님의 간절한 눈빛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이었거든요. 사진집은 이른바 ‘벽돌책’이었습니다. 사진 색인까지 포함해 584쪽에 수록된 사진은 458점입니다. 1920년대부터 1983년까지 한암(漢岩·1876~1951), 탄허(呑虛·1913~1983) 그리고 만화 스님을 중심으로 오대산 월정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진들입니다. 게다가 눈에 띈 점은 단순히 사진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취재와 연구를 통해 사진에 얽힌 ‘스토리’를 설명하고 있는 점이었습니다. 사진 한 장에 설명이 두 페이지에 걸쳐 이어진 경우도 있지요. 전후맥락을 사진과 설명만 읽고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조선일보

근대 오대산의 큰 스승인 한암 탄허 만화 스님(왼쪽부터)과 '근대 오대산 삼대화상' 표지.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사진설명은 민족사 윤창화 대표가 맡았더군요. 윤 대표는 강원 평창 진부 출신으로 14년간 출가수행자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한 2년 절에 가서 한문이라도 배우라’는 어머니 권유에 끌려 월정사로 출가해 만화 스님의 상좌(제자)가 됐었지요. 1979년 환속한 그는 그러나 불교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 불교 전문 출판사인 민족사를 설립해 40년 넘게 불교 전문 서적을 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진집을 내고 설명까지 도맡은 것은 스승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올해로 탄신 100주년을 맞은 만화 스님에 관한 ‘오대산을 지켜낸 선승, 만화희찬’을 펴내면서 만화 스님의 스승인 탄허, 탄허 스님의 스승인 한암 스님까지 3대에 걸친 월정사의 역사를 사진집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조선일보

1936년 상원사 선원에서 한암(앞줄 왼쪽 두번째) 스님과 선원 대중 스님들이 촬영한 사진.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한암 스님이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앞에서 촬영한 사진. 한암 스님은 1925년 상원사로 들어간 후 바로 아래에 있는 월정사에도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월정사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희귀한 자료다. /민족사


사진집은 한암 스님으로 시작합니다. 한암 스님은 한국 근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이지요.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4차례나 종정에 추대됐을 정도였습니다. 봉은사 조실로 있던 1925년 “내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봄날에 재잘거리는 앵무새는 되고 싶지 않다”는 시를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향했지요. 이후 스님은 1951년 입적할 때까지 치과 치료와 불국사·통도사 방문 등 2차례 외에는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덕분에 오대산은 한암 스님에게 가르침을 얻으려는 수행자들로 넘쳤지요. 6·25 당시 국군이 작전 상의 이유로 국군이 상원사를 소각하려했을 당시 스님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가사를 입고 선당(禪堂)에 정좌한 스님은 “자, 이제 불을 지르라”고 했다지요. 절과 자신을 함께 태우라는 스님의 서슬퍼런 기개에 상원사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전쟁 중이던 1951년 좌선하듯 앉은 모습으로 입적(좌탈)했습니다.

조선일보

한암 스님이 1937년 통도사 경봉 스님에게 보낸 연하장. 1월 13일 진부우체국 소인과 1월 17일 언양우체국 도장이 찍혀 있어 당시 배달에 나흘 걸렸음을 알 수 있다.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집에는 눈에서 불덩이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한암 스님의 모습과 제자들, 방문객들과 함께 촬영한 다양한 사진이 수록됐습니다. 희귀 사진도 많습니다. 저는 홍천의 한 여성신도에게 보낸 편지가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스님은 한글로 적은 이 편지에서 “화두는 별도로 찾으실 것 없이 일심으로 염불하시는 것이 화두와 다르지 않다”며 “화두도 일심, 염불도 일심, 모두가 일심이라야 성취하오니, 온갖 사무 보시는 중에 일심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간단없이 염불하시면 일거양득으로 세(世), 출세간(出世間)이 다 구족하게 성취하십니다”라고 적었다. 언제 어디서나 화두를 들고 일심으로 수행하기를 간곡히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 수행의 핵심을 이렇게 쉽게 설명하고 권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도인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1941년 한암 스님은 종정에 추대됐지만 오대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불교학자로 유명한 이능화는 월간 ‘불교시보’에 “한암선사가 불출산(不出山)을 결심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조계종 초대 종정의 자격을 갖춘 분이라”라고 적었습니다.. 당 황제가 칙사를 보내 황궁으로 초대해도 질병을 이유로 조계산을 나오지 않은 육조(六祖) 혜능 대사와 같다고 칭송한 것이지요. 윤 대표는 이런 기사까지 찾아내 사진과 함께 수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한암 스님이 1931년 친필로 써서 엮은 '경허집' 표지. 당시 보건위생 포스터 종이를 재활용해서 화장실 사용법 등이 적혀 있다. /민족사


조선일보

1959년 한암 스님의 부도를 설치하는 모습.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스님들이다. 당시에는 스님들이 사찰의 공사 대부분을 직접 했던 것을 보여준다. /민족사


한암 스님이 경허 스님의 시를 모아 1931년 친필로 쓴 ‘경허집’ 표지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 표지는 당시 보건위생 포스터 종이를 재활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지엔 ‘벼룩은 2개월 내지 12개월 생존한다’ ‘다음 사람이 변소를 잘 사용하게 변소를 깨끗이 하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이 경허집 사진엔 ‘인사동 고서점에 나온 것을 고서 수집가 김민영 선생이 발견해 2009년 월정사에 기증했다’는 스토리까지 적혀 있습니다.

조선일보

탄허 스님이 1971년 서울 동대문구 청룡사에서 '원각경'을 강의하는 모습. 당대의 대석학이었던 탄허 스님은 강의하는 사진을 많이 남겼다.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1970년대 초반 통도사 극락암으로 경봉 스님(오른쪽)을 찾아가 만난 탄허 스님.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1966년 월정사 대웅전 상량식에 성철 스님이 참석했다. 왼쪽 두번째부터 탄허 성철 만화 스님.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탄허 스님은 유불선에 모두 통달한 근대 한국 불교의 대강백(大講伯)이자 대석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집에도 사찰과 대학 등에서 강의하는 사진이 많습니다. 사진 중에는 1977년 월정사에서 2개월 동안 화엄경을 강의한 ‘화엄법회’ 모습도 있는데 당시 기념 사진집엔 현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도 보입니다. 입적 1년 전 세계고승법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해 뉴욕 자유의 여신상,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앞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시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조선일보

만화 스님은 월정사 대웅전 중창 당시 불상 축소 모형을 놓고 조성과정을 점검했다.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1970년대 후반 암자를 수리하는 만화 스님. 만화 스님은 6.25로 잿더미가 된 월정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민족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만화 스님은 한암, 탄허 스님에 비해 일반인에겐 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만화 스님은 6·25 이후 잿더미가 된 월정사를 묵묵히 다시 일으켜 세운 주인공입니다. 평안도 출신인 만화 스님은 1939년 월정사에서 탄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평생 한암 스님의 ‘승가오칙’을 따르며 1951년 한암 스님이 입적할 당시 곁을 지키고 다비(장례)까지 치렀던 스님은 1950년대 월정사 주지를 맡아 탄허 스님이 주도한 ‘오대산 수도원’의 살림을 책임졌습니다. 양봉, 표고버섯 재배 등을 통해 부족한 재정을 마련했으며 중건 불사 과정에서 목재 벌채 문제로 여러 차례 입건되기까지 했다고 하지요. 사진집에도 만화 스님이 공사 목수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은 사진집 발간에 대해 “만화 선사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오대산 문수성지의 삼대화상 사진과 행적을 모은 사진집을 발행한다고 하니, 이 또한 1400년 오대산 불교 속의 의미심장한 사적(事蹟)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치사했습니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등 여러 스님들과 민족사 윤창화 대표 덕분에 귀한 자료들이 실에 꿴 구슬처럼 엮였습니다.

조선일보

민족사 윤창화 대표가 '근대 오대산 삼대화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윤 대표는 만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탄허 스님을 곁에서 시봉하며 경전 공부와 출판 등을 배웠다. /김한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한수의 오마이갓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4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