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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며칠 됐다고…英 총리 감세 헛발질에 조기퇴진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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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3일(현지시간) 영국 감세안 철회를 발표한 쿼지 콰텡 재무장관이 인터뷰 도중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로이터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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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의 대규모 감세정책이 결국 10일 만에 실패한 모험으로 끝났다.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은 3일(현지시간) "우리는 45% 세율 철회를 진행하지 않겠다"면서 고소득자 세금 감면을 포기했다.

영국 정부가 야심 차게 발표한 감세정책 중 '고소득자 세금 감면'을 포기한 것은 사실상 감세안을 그대로 강행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고소득자 감세는 이번 정책 중 가장 상징성이 컸던 정책이다. 영국에서 45% 세율이 적용되는 소득 구간은 성인 인구의 1%가량인 50만명에게만 해당하지만, 이들이 워낙 고소득층이라 세입 규모는 60억파운드(약 9조6000억원)에 달한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영국이 굴욕적인 감세안 유턴을 강요당했다"고 보도했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달 23일 향후 5년간 490억달러(약 72조원)의 세금을 깎아주는 파격적인 정책을 공개했다. 코로나19 관련 보조금 지급으로 빈 나라 곳간을 채우기 위해 전임 보리스 존슨 총리가 추진했던 법인세 증세는 포기하고, 연 15만파운드(약 2억4100만원) 이상 버는 고소득자에 대해 최고세율 구간을 없애 세금을 낮춰주는 내용이 골자였다. 뉴욕타임스(NYT)는 영국 발표안이 1972년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세라고 평가했다. 트러스 정부는 감세를 통해 기업 활동을 늘리고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하지만 취지와 달리 영국 감세정책은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앞다퉈 인상하는 흐름을 역행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준금리를 인상해온 영국중앙은행(BOE)의 움직임과도 엇박자를 냈다. 영국 정부는 감세정책과 함께 600억파운드(약 96조5000억원)에 달하는 에너지 보조금 지급 방안도 발표했는데, 이 역시 유동성 흡수에 초점을 맞춘 전 세계 기조와는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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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파운드화 환율은 감세안 발표 이후 열흘 동안 롤러코스터를 탔다. 지난달 12일까지만 해도 1.17달러였던 파운드화는 발표 후 26일 1.03달러까지 급락했다가 29일에야 1.12달러대로 돌아왔다. 주요국 통화가 며칠 새 12% 이상 떨어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영국 10년물 국채금리가 4.5%까지 치솟고, 국채 가격 하락으로 영국 연기금이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위기에 직면하자 BOE가 지난달 28일 긴급 국채 매입 발표로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로이터는 "영국의 감세안은 영국 정부에 대한 신뢰 위기를 불러일으켜 파운드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세계 시장을 충격에 빠뜨렸다"고 진단했다. 정책 철회가 이뤄진 3일 영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3.8%대까지 하락하면서 감세 정책 발표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전문가들은 영국 정부의 결정을 맹비난했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억제 기조와 맞지 않고, 감세안을 뒷받침할 만한 예산 계획도 구체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코로나19 이후 바닥난 재정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파격정책'이라는 비난도 거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BOE의 국채 매입 결정은 정부 재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파운드를 찍어내겠다는 뜻처럼 보인다"며 "물가가 완전히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부 장관은 "대규모 감세는 완전히 무책임한 정책"이라며 "통화 약세와 장기채 금리 상승 기조 강화는 (국가) 신뢰도 상실 상황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또 "영국의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이 아직 큰 수준은 아니지만 가파르게 상승 중"이라고 밝혔다. NYT는 "감세와 규제 완화 정책이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영국 파운드화를 폭락시켰다"며 "총리의 정치적 미래도 점점 위태로워 보인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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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29일 트러스 총리는 "경제가 성장하도록 기꺼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겠다"면서 감세정책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트러스 총리는 당시 BBC에 감세정책에 대해 "콰텡 재무장관이 내린 결정이었다"고 선을 그었지만 "올바른 결정"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강행 소식이 알려진 후 영국 런던 증시 FTSE100지수는 전 거래일 종가 대비 1.77% 하락하는 등 혼란이 커졌다.

트러스 총리가 강행을 공언한 지 나흘 만에 결정을 번복한 것은 국내외 경제 전문가들은 물론 당 내부에서까지 파격적인 감세안에 대한 비난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보수당 의원 중 최대 70명이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밝혔고, 45% 세율 폐지안을 1년 미루자고 촉구하는 의원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은 '감세안 철회' 소식에 일단 안도했다. 영국 MUFG의 통화 분석가인 리 하드먼은 "이번에 철회한 정책은 450억파운드 감세안 중 20억파운드에 불과하지만 정부가 압력에 굴복하고 있다는 의미"라면서 "정부가 더 많은 감세나 지출을 줄이려는 계획을 뒤집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러스 총리가 취임 이후 처음 내놓은 정책을 열흘 만에 번복하게 되면서 그의 정치적 운명도 가늠하기 어렵게 됐다. 차기 총선 이전에 트러스 총리가 교체될 가능성도 언급된다. 1일 발표된 오피니엄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러스 총리 정책 지지율은 18%에 그친 반면 반대한다는 응답은 55%에 달했다. 집권 한 달 만에 전임 테리사 메이와 보리스 존슨 총리 퇴진 직전 수준으로 지지율이 하락한 것이다. 제1야당인 노동당의 역공도 거세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지난달 27일 리버풀 전당대회에서 "나라가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유진 기자 / 김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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