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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 2030 여성노동자 절반 “정신의학 치료”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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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5월19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 시행을 맞아 ‘성희롱 방치, 성차별 신고하세요’ 캠페인이 열린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직장 내 성차별, 성희롱 피해를 증언한 여성 노동자들이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현수막을 들고 서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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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직원들한테 고객 응대 업무나 이런 걸 다 떠맡기면서 ‘이건 건 여자가 하는 거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회사가) 좀 사근사근 웃어야 되고 판매를 해야 하는 일에 여성 직원을 많이 쓰려고 해요.” (29살 콜센터 상담원 ㄱ씨)

“(회사가) 여성 직원한테 자질구레한 일만 주니까 결국에는 남성 직원들한테만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가게 되고…. 여성 직원을 하기 쉬운 일을 하는 작업장에 보내는 게 배려라고 하지만, 그 직원은 계속 도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25살 공기업 직원 ㄴ씨)

우울증 환자 중 20대 여성 비율이 최근 증가하는 등 청년 여성들의 정신건강 지표들이 악화하고 있는 가운데, 노동 강도뿐만 아니라 젠더 불평등한 노동 환경이 청년 여성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9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펴낸 ‘청년 여성 노동자의 노동 경험과 정신건강 연구 보고서’를 보면, 20∼30대 여성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노동 환경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구진은 지난해 6월29일부터 올해 1월9일까지 20∼30대 여성 노동자 18명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연구에 참여한 청년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부터 업무 배치, 승진 등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물리치료사인 ㄷ(27)씨는 사업주가 남성 물리치료사만 수가가 높은 도수 치료를 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병원이) 남자만 도수 치료가 가능하도록 근로계약을 체결했다는 얘기를 저희한테 하는데, 말이 안 되는 거죠. 이러면 똑같은 시간을 일해도 급여 차이가 확 나요. 기본급이 똑같다고 한다면 인센티브만 150만원이나 차이가 나요.”

게임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ㄹ(32)씨는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남성이 연차는 아무리 길어봐야 2∼3년이고, 나이는 저보다 한 살 어린 정도였다. 당연히 ‘사원’으로 들어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명함을 보니까 직급이 ‘대리’였다”며 “제가 사회 생활을 좀 일찍 시작한 편이어서 연차에 비해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이 차이는 성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성별 고정관념 때문에 실제 사무직이 아닌데도 문서 작업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하철 역무원인 ㅁ씨(26)는 “(회사에)여성 직원들이 사무 업무에 대해 꼼꼼하고, 남성 직원은 못 할 거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분들이 너무 많다. 여성 직원들이 진급을 많이 했는데도 사무 업무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조직 문화는 여성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꼽혔다. 연구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은 연령과 성별에 따라 위계화된 조직 문화(중요하지 않은 일을 직급 또는 나이가 어린 여성이 맡게 되는 문화)를 많은 업무량과 장시간 노동 못지 않게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ㄹ씨는 “제가 내는 의견이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내는 의견이 아니라 뭔가 되게 튀고, 그냥 요즘 젊은 애들 뭐 이런 식으로 취급되는 것이 제겐 너무 스트레스”라고 토로했다. 연구진은 “청년 여성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일터에서의 젠더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원인이기도 한 ‘남성 중심 일 문화’는 여성 노동자들이 업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문제를 만들어낸 성차별을 문제삼기보다는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식으로 문제를 오도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불합리한 조직 문화에는 성희롱과 같은 젠더 폭력과 젠더 불평등도 포함돼 있다. 연구진은 “연구 참여자 18명 중 절반인 9명이 정신건강 문제로 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ㅂ(27)씨는 “회사 대표가 저를 만날 때마다 ‘남자친구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면 ‘그러다 속에 거미줄 쳐진다’ 그런 성희롱도 하고, 막 제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잘 부탁한다’고 그랬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 회사 개발자인 ㅅ(28)씨는 “다른 외주 개발사에서 우리 회사에 와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예쁜 아가씨 옆에 끼고 일하니까 기분 좋지?’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갔다”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그 사람들은 사과를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조금 많이 아팠던 일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직장 내에서 성희롱 또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지만 회사가 가해자에게 징계 조치를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를 감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센터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터졌는데 진짜 가관인 게, 가해자는 퇴사를 했어요. 퇴사 처리 없이 퇴사를 했는데, 그 이후에 피해자에 대해 계속 감시 조치가 내려지고 있는 상황이에요. 피해자가 흘리고 다녔다고. 피해자 보고 ‘너 옷 똑바로 입고 다녀라. 내가 다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라고 센터장이 그랬대요. 피해자한테 ‘너 문제 일으키면 안 된다’고.” (ㄱ씨)

연구 참여자들은 남녀고용평등법과 같이 일터 내 불평등을 규율하는 법이 존재하지만 이에 미치지 못하는 인식이 문제라며 무엇이 차별인지를 알리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연구진은 “심층 면담에서 개별 여성 노동자들이 바라는 대안들은 전적으로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이었다”며 “결코 무리하거나 특별한 요구가 아니라 법과 원칙을 지켜달라는 요구였고, 나이와 성별에 무관하게 동료로서 존중해달라는 외침이었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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