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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환상인가 현실 도피인가… E세계 휩쓴 ‘異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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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만화계 ‘이세계’ 열풍

평범한 삶을 사는 주인공이

다른 차원에서 영웅이 되는

‘이세계’ 주제 웹툰 인기몰이

현실 장벽에 박탈감 느끼는

젊은 세대의 도피·대리 만족

일각선 “소재 다양성 무너져”

조선일보

역기를 들다 기절한 보디빌더가 어느 낯선 이(異)세계에서 다시 눈 떠 가장 힘 센 자로 군림한다는 내용의 신작 웹툰 ‘헬스던전’.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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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아니다. 이세계(異世界)다.

월 수입 50만원, 가망 없는 일상에 체념하며 주인공은 온라인 게임에 매달린다. 별 인기도 없는 게임에 11년을 쏟아 처음으로 클리어한 게임 유저가 되지만 큰 의미는 없다. 그런데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느닷없이 그 게임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다. 인류 멸망이 예고되고 이 게임을 유일하게 마스터한 주인공은 쉽사리 ‘이세계’의 독보적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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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고등학생이 마법의 이세계로 소환돼 최강 전사가 된다는 내용의 ‘FFF급 관심 용사’(왼쪽). 평범한 회사원 주인공이 10년 넘게 읽던 소설이 현실이 되면서 특별한 존재로 변모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 /이미지프레임·레드아이스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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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현실을 뒤집는 이른바 ‘이세계’ 웹툰이 만화계를 휩쓸고 있다. 위 내용을 줄거리로 삼은 웹툰 ‘나 혼자 만렙 뉴비’뿐 아니라 ‘이세계 전담반’ ‘이세계가 체질입니다’ ‘이세계가 나를 놔주지 않는다’ 등 동일 소재 작품이 수십 점씩 서비스되며 대세가 된 것이다. 30일 개막하는 국내 최대 만화 행사 부천국제만화축제는 아예 올해 주제를 ‘이세계’로 잡았다. 판타지 만화의 가장 뜨거운 키워드 ‘이세계’와 디지털 시장 ‘e세계’를 동시에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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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고등학생이 마법의 이세계로 소환돼 최강 전사가 된다는 내용의 웹툰 ‘FFF급 관심 용사’. /이미지프레임


‘이세계’는 역사가 유구한 상상이지만, 2010년대부터 일본에서 ‘이세계(isekai)’를 타이틀로 내세운 라이트노벨 및 만화가 쏟아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도 번역체 그대로 수입돼 하나의 독특한 장르로 구축됐다. 감정이입을 극대화하는 고유의 클리셰로는 ①평범한 주인공이 ②죽거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③혼자만 알고 있는 노하우로 ④최강의 실력자가 된다는 서사 흐름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온라인 게임’ 형식이 개입한다. 몬스터를 처치하며 레벨을 올리는 성장형 게임을 배경 삼아 전투 장면과 박진감을 확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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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인이로군." 웹툰 ‘쥐뿔도 없는 회귀’ 속 이세계로 갑자기 내동댕이 쳐진 주인공에게 한 괴한이 말을 걸고 있다. 당연하게도 주인공은 곧 이 괴한을 일격에 처리해버린다. /키다리스튜디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일거에 영웅으로 거듭나는 스토리에 열광하는 세태는, 이미 ‘이세계’ 장르가 유행한 일본에서 진단이 이뤄진 바 있다. 현실적 장벽으로 박탈감이 커지면서 젊은 세대가 판타지로의 도피를 택했다는 분석이다. 2018년 니시모토 간지·코하라 코우 작가는 ‘이세계’ 범람을 비꼬는 단편 만화를 발표했다. “아마 독자들은 현재에 절망해 손쉬운 망상의 세계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 일본에는 ‘이세계’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뇌를 비우고 말이다.” 이 만화는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화제를 모았고 “한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반응이 다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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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니시모토 간지·코하라 코우 작가가 2018년 발표한 단편 만화. 당시 일본에 광범위하게 퍼진 '이세계' 장르 범람을 비꼬는 내용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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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에 편승하려는 비슷비슷한 양산형 작품이 쏟아지면서 다양성이 실종되고 있다는 비판도 비등한다. 최대 웹툰 플랫폼 네이버웹툰의 한 댓글 창에는 “똑같은 소재에 똑같은 클리셰 범벅… 매번 이런 식이면 독자들은 질리게 돼있다”는 베스트 댓글이 달려 큰 공감을 얻었다. “예전 웹툰은 조금 서툴러도 독창적이었다면 요즘 양산형 웹툰은 그림 퀄리티는 뛰어나도 매력이 떨어진다”는 댓글도 달렸다. 이 같은 유사 제품의 공장식 생산에 대한 지적은 지난 26일 ‘웹툰 생태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국회 정책 토론회’에서도 등장했다. 기조 발제를 맡은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웹툰 지식재산권 가치가 높아지면서 특정 장르 편중 현상이 발생하게 됐다”며 “산업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작품 다양성이 함께 추구돼야 한다”고 했다.

☞이세계(異世界) 만화

201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장르로, 현실에선 평범한 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이동해 독보적 존재가 되는 내용이다. 2020년대 들어 한국에서도 급속도로 유행하고 있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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