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외환위기였다. 고도성장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한국엔 ‘빚을 내서라도 투자하면 돈을 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은행은 해외에서 돈을 빌려 다시 기업에 빌려줬다. 1990년대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서 빌려 쓴 외채를 갚지 못했고,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삼미·진로·한라·해태·기아 등이 굵직한 기업이 줄줄이 부도났다.
결국 1997년 11월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67년 외국환 전문은행으로 설립된 외환은행의 사정도 나을 게 없었다. 1998년 5월 독일 코메르츠방크가 지분 29.79%를 인수하며 당장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2002년 카드 사태와 현대건설의 부실로 외환은행도 휘청이게 되자 코메르츠방크는 외환은행 지분을 시장에 내놨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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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국민은행 등 국내 대형 은행이 물망에 올랐지만,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외환은행을 품을 여력이 있는 곳은 없었다. 당시 하이닉스 등 부실 대기업을 떠안고 있던 외환은행을 품으면 이 리스크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당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외환은행에 관심을 보이며 등장한 것이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다. 2002년 10월 외환은행 경영권 인수를 전제로 투자의향서를 제출하며 론스타와 외환은행, 한국 정부와의 질긴 악연이 시작됐다.
2003년 7월 외환은행은 외자 유치를 위한 배타적 협상자로 론스타를 선정했고, 한 달 뒤 론스타는 외환은행 지분 51%를 1조3834억원에 샀고 그해 9월 금융감독위원회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4년 2월 외환카드를 흡수합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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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외환은행 인수 3년 만에 매각 나서
인수 이듬해인 2004년 외환은행 주가가 급등하며 론스타가 1조원가량의 평가 이익을 얻자 '헐값 매각'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은 2005년 국정감사에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을 제기하고, 국회의 감사 청구로 감사원이 감사에 나선다.
그러는 사이 2006년 외환은행 매각에 나선 론스타는 그해 3월 국민은행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내정했다. 론스타가 3년 만에 인수 금액의 세배 수준(6조원 이상)에 달하는 가격으로 외환은행을 팔겠다고 나서자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과 '헐값 매각' 등을 둘러싼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당시 은행법에 따르면 금융자본만이 은행을 인수할 수 있었다. 예외는 국제결제은행(BIS)가 권고하는 자기자본 비율이 8% 미만인 부실 금융사를 인수할 때는 예외가 적용됐다. 산업자본(비금융주력자)인 론스타는 예외 규정을 적용받아야만 외환은행을 인수할 수 있었다.
이강원 당시 외환은행장이 금융감독원에 BIS 비율을 6.16%로 보고해 당국의 예외 승인을 받은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2년 뒤, 외환은행의 부실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은행 이사회가 보고한 외환은행의 BIS 비율은 10%였지만, 금감원 보고 때 해당 수치를 낮췄다는 것이다.
감사원이 2006년 6월 외환은행이 헐값 매각됐다는 결과를 발표했고, 이후 대검 중수부가 외환은행 헐값 매각 수사에 나서 2006년 12월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과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을 기소했다. 이 전 행장과 변 전 국장은 2010년 대법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 속 2006년 11월 론스타는 국민은행과의 매각 계약을 파기했다.
외환은행 새주인 찾기에 나섰던 론스타의 손을 잡은 곳은 영국계 은행 HSBC다. 2007년 9월 5조9376억원에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12월 HSBC가 금감위에 승인 신청을 했지만, 금융당국은 인수 승인을 내주지 않았다. 대주주 적격성과 관련한 외환카드 주가 조작 사건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탓이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세계금융위기가 시작됐고, HSBC는 외환은행 인수를 포기하고 매매 계약을 파기했다.
2년 뒤인 2010년 4월 론스타는 외환은행 매각 절차를 재개했다. 그해 11월 하나금융은 론스타와 3조9157억원에 외환은행 지분 인수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외환카드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한 재판이 이어지며 금융위의 승인이 나지 않았다.
2011년 3월 주가 조작 혐의로 론스타의 유죄가 확정되자, 금융위는 그해 11월 론스타의 은행 대주주 적격성 상실을 선언하고 외환은행 지분 51% 중 41%에 대한 매각 명령을 내렸다. 은행법상 외국인은 금융자본이라도 동일인이 한 은행의 지분을 10% 이상 보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자본 논란을 빚었던 일본의 골프장을 론스타가 매각한 뒤, 금융위는 론스타가 산업자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2012년 1월 하나은행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했다. 1조3834억원에 외환은행을 샀던 론스타는 배당 및 매각 이익으로 4조7000억원의 차익을 남기고 '먹튀 논란'은 거세졌다.
외환은행 매각으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다. 더 길고 지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론스타는 2012년 11월 국제투자분쟁(ISDS) 절차에 따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46억7950만달러(당시 5조6000억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절차를 지연시키고, 외환은행 매각 차익에 대한 부당한 과세로 손해를 봤다는 주장이다.
외환은행 인수와 매각, 이어진 국제투자 분쟁까지 20년간 이어진 한국 정부와 론스타의 악연은 31일 ISDS 중재재판부가 한국 정부가 2억1650만 달러(약 2800억원) 및 관련 이자(소송 제기일부터 완제일까지 한 달 만기 미국 국채수익률 적용) 배상을 명령하며 일단락됐다. 론스타의 청구금액(46억7950만 달러) 중 4.6%를 인용한 것이다.
박상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애초에 감사원의 지적대로 불법 매각에 대한 엄중한 조사와 처벌이 있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분쟁”이라며 “론스타 청구액의 5% 남짓이라고 하지만 2800억원이라는 막대한 세금을 잃고 국가 신뢰도에도 타격을 입었다”고 지적했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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